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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장로회 선교사

밀러(민로아) 부부, 1899년

다음은 흔히 목포의 유진 벨과 로티 벨 가족 사진(1901년, 헨리와 샬로트)으로 알려져 있고, 유진벨 기념관 웹사이트에도 올라가 있으나, 초기 단체 사진에 나오는 선교사들을 확인해 보면, 이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밀러(Frederick Scheiblin Miller 閔老雅, 1866-1937) 가족 사진이다. 부인 안나(Anna Reinecke Miller, 1865-1903)가 1903년 6월 17일 복막염으로 별세했으므로, 그 전에 촬영했다. 촬영시기와 장소를 짐작해 보면  1899년 피츠버그이다. 사진의 아이들은 장녀 리세트(2세)와 장남 윌리엄 뉴톤(4세)이다. 부인은 아래 1891년 사진의 옷과 동일한 것을 입고 있다. 1898년 10월 아들을 잃고나서 1899년 4월 부인의 고향인 피츠버그로 안식년을 휴가를 갔는데 이때 찍은 듯하다. 집 모습이 미국 현지 집으로 보인다. 아직 셋째 안나가 임신되기 전이다.

밀러 목사 가족, 1899년 (밀러 부부와 딸 리세트, 아들 윌리엄 뉴톤)

1899년 유진 벨 부부는 어린 아들 윌리엄을 두고 있었는데 다음은 알렌 가족이 목포의 유진 벨 사택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따라서 흔히 알려진 위 사진은 벨 가족이 아니라 밀러 가족이다.

참고로 아래 사진들에서 밀러 부부를 확인할 수 있다.

서울 예수교학당, 1891년 (A= Anna Miller, M +F. S. Miller)

 

1893년 10월 북장 한국선교회 연례회의, 11번이 밀러 목사, 14번이 부인 안나 [Moffett Collection]
스피어 총무 서울 방문, 1897년 [PHS] M = F. S. Miller, A = Anna R.Miller. 안나는 임신 중이다. 위의 가족 사진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
1901년 9월 장로회공의회, 서울 제중원 [PHS], M이 밀러.

 

참고로 밀러 목사가 찬송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의 작사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1. 밀러는 1904년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번역했다.

밀러는 개인적으로 많은 슬픔을 겪었다. 그러나 여러 블로그에 떠도는 대로 자녀와 아내를 잃고 현 찬송가 95장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작사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조셉 하트(Joseph Hart, 1712∼1768) 목사가 1757년 개종하면서 작사한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밀러 목사가 번역하여 <찬셩시>(1905년) 52장 "쥬는 풍셩함"으로 실었다. 

2. 여러 각색된 글을 읽으면 자녀들이 모두 죽은 것처럼 오해할 수 있으나, 그 전에 태어난 큰 아들과 두 딸은 잘 자랐다.  

첫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다섯 명이었는데, 다음 세 명이 생존했다. 둘째 부인 수잔 도티( Susan Doty)가 잘 양육해 주었으며, 1909년 당시 큰 아들 윌리엄과 둘째 딸 리세트는 중국 지부의 선교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1909년 밀러가 보고한 세 자녀는 다음과 같다. 

서울의 총영사가 확인, 보고한 밀러 가족 등록부, "Certificate of Registration of American Citizen," Dec. 8, 1909.

곧 밀러 부부가 한국에 도착한 1892년 11월 이후 약 2년 만인 1894년 10월 7일에 첫 아들   William Newton이 태어났으며, 1909년에 중국 지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어 2년 후인 1896년 3월에 딸 Lissett Reinecke가 태어났으며, 역시 지푸 학교에 갔다.

만일 널리 퍼져 있는 글대로 내한 후 6년 만에 첫 아들이 태어났다면 그는 1898년 가을에 태어나야 하고, 태어난 지 8개월만에 사망했다면 1899년 봄이나 여름에 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둘째 아들이 1898년 3월 2일에 태어났다. ("Notes and Comments: Births," Korean Repository (April, 1898): 160.) 그는 10월에 사망했다. 

그 3년 뒤(내한 9년 차) 1902년 3월 7일에 둘째 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다섯 째 아이가 태어났으나, 다음 날 사망했다.  두 아들은 한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3. 안나 밀러 부인의 사망 병명은 복막염이었다. 

안나 밀러 부인은 2년마다 자녀를 출산하면서 건강이 좋지 못했다. 1898년 3월 넷째를 출산하고 10월에 유아가 사망하자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밀러 목사는 가을에 사역을 하지 못하다가 11월이 되어서야 조사 김흥경과 함께 곡산 등 지방 전도에 나설 수 있었다. 1899년 2-3월에 건강을 회복한 후, 부부는 4월에 안식년 휴가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로 갔다. 아내가 자란 도시로 처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안식년으로 건강을 회복한 밀러 부부에게 뉴욕에서 셋째 딸 안나가 1900년 3월 13일에 태어나 기쁨을 주었다.  다섯 식구는 1900년 4월 서울로 돌아왔다. 

2년 후 1902년 3월 7일에 밀러 부인은 다섯 째 (둘째 아들)을 출산했으나 이튿날 사망하는 슬픔을 맛보았다. 30대 중반에 출산한 넷째에 이어 다섯째가 바로 사망하자, 그녀는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건강도 악화되어 1년 넘게 병상에 있다가 1903년 6월 17일 사망했다. 병명은 복막염이었다. 양화진에 장사했다. 38세 5개월을 이 땅에서 보내다가 하늘 나라로 갔다. 밀러 목사는 아내 병 간호로 한 해 정도 지방 전도는 조사들에게 맡긴 채 서울에 머물어 있었다. 아펜젤러를 잃은 지 1년 만에 다시 서울 선교사들은 손 접대하기를 기뻐했던 밀러 부인을 잃는 슬픔에 빠졌다. 그녀가 평소 출석했던 연동교회는 민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국 북장로회 월간지는 밀러 부인의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Assembly Herald (August 1903): 370.

밀러 목사는 이후 1904년 도티와 결혼하고 1905년 6월 청주 선교지부에 부임했다. 그곳에서 함께 사역하던 아내 도티가 1930년에 소천하자, 1933년에는 Lillian Dean과 결혼하여 세번째 아내를 맞았으나, 그녀도 밀러 목사가 사망한 1937년에 죽었다. 둘째와 세째 부인과는 나이가 들어 혼인했으므로 자녀가 없었다. 밀러 목사는 선교지에서 선교사의 혼인은 평온한 본국의 경우와 달리, 예외적으로 아내 사후 1-2년 정도에 재혼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야 선교 사역을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13년 아들과 두 딸과 함께 찍은 밀러 목사와 부인 수잔의 모습니다. 지금까지 찬송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와 연관된 밀러 목사의 자녀 문제는 위와 같은 정리와 함께 아래 사진 한 장으로 모두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밀러 목사는 세 자녀를 키우며 청주 선교에 매진했다. 

밀러 가족, 1912 [Clark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