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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장로회 선교사

1939년 5월 24일 엥겔(Gelson O. Engel) 목사 별세

1939년 5월 24엥겔(Gelson Engel, 王吉志, 1868-1939) 목사(부산, 호장) 별세

왕길지는 1900년 10월 29일 부산에 도착한 이후 1938년 은퇴할 때하기까지 38년간 부산(1900-1919)과 평양(1919-1937)에서 활동했다.

그는 고전어(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현대어(영어, 불어, 이태리어), 인도 방언(마라티어 Marathi, 힌디어 Hindi, 우르드어 Urdu)과 동아시아어(한국어, 한문, 일본어)에 능했다. 이런 언어적 능력으로 그는 구약학자요 신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성경 번역에 공헌했다. 

그는 선교사로서 교회 개척과 순회 전도, 경남 지역 교회 감독과 당회를 운영했다. 그밖에 일신여학교 교장, 경상 노회와 경남 노회에서의 활동, 총회 활동을했다. 평양의 예수교장로회신학교와 숭실대학 교수로서 가르치며 각종 저술 활동을 하고, <신학지남> 편집, 찬송가 편찬 작업, 성경 개역 작업을 감당했다.  

내한 이전

엥겔은 1868년 10월 10일, 남부 독일 워템베르그(Wurtemberg)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서 가난하게 자랐다. 1888년 뉘르팅겐에 있는 뤼르 세미나(Lehrer Seminar)를 졸업했다. 에빙겐(Ebingen)에서 열린 한 선교 모임에 참석한 후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1889년 스위스 바젤(Basel)에 있는 바젤선교교육원(Basel Mission House)으로 가서 3년간 교육을 받았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교사 훈련을 받은 후, 1892년 6월 워템베르그의 발링겐(Balingen)에서 바젤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인도의 푸나(poona) 지방에 파송되었다. 그는 인도에서 6년 간 선교사로 봉사했다. 감리회 선교부로 이적하고 테일러 고등학교(Taylor High School for Boys) 교장으로 봉사했다.

엥겔은 푸나에서 1894년 12월 19일 호주 여성인 클라라 바스(Clara Bath) 양과 결혼했다. 그는 인도에서 평생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건강 때문에 1898년 아내의 나라인 호주로 이민을 갔다. 호주에서 빅토리아 주 스타웰(Stawell)에 있는 하버드 초중등학교(Harbard School) 교장으로 약 2년간 봉사한 후 빅토리아 주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에 정식 가입했다. 당시 여전도회 연합회는 한국에 파송할 목사를 찾고 있었는데, 인도 선교사 6년의 경험이 있는 엥겔이 적절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내한과 부산 선교, 1900-1919

엥겔은 1900년 9월 19일 아내와 세 아이(Gelson, Herbert, Dora)를 데리고 멜버른을 떠나 10월 29일 부산에 입항했다. 엥겔은 부산진에 있는 여선교사들이 기거하던 집에 살면서 한국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1월 19일부터는 규칙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위한 시간을 배정하고, 한국인의 삶과 문화, 곧 생활과 풍습, 살림살이를 익혔다. 한국어 습득을 위해서곧 한문 공부도 시작했다.

첫 부인 클라라는 1906년 4월 2일 시드니에서 3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엥겔은 1년 후인 1907년 7월 3일, 한국 선교사로 활동 중이던 아그네스 브라운(Agnes Brown, 1868~1954) 양과 재혼했다. 브라운은 1868년 8월 11일 생으로 1895년부터 한국 선교사로 일했다. 엥겔은 부산에서 18년 가까이 목회 선교사로 사역했다.

한국(부산)에 파송된 초기 호주 선교사와 자녀들. 뒷줄 왼쪽부터 데이비드 라이얼, 엘리자베스 베시 무어, 제임스 노블 맥켄지, 엘리스 니븐, 휴 커를, 아그네스 엥겔, 겔슨 엥겔, 앤드류 아담슨, 카밀라 아담슨, 에델 커를 선교사와 자녀들 (1910년 3월, 부산)   

또한 1902-13년에는 일신여학교 2개 교장으로 봉직했다. 1913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되어 봉사했다. 1917년 경남노회 창립노회의 노회장으로 일했다. 

신학교 교수, 1919-1939

엥겔은 1902년부터 평양 장로회신학교 강사로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06년부터는 호주선교회를 대표하여 교수진으로 참여하여 매년 3개월씩 평양에 거주하면서 가르쳤다. 1919년부터는 전임 교수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이주하고 신학 교육에 전념했다. 성경 언어와 교회사를 가르쳤고, 도서관장으로 봉사했다. 1920-23년 숭실전문학교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강의했다.

엥겔 선교사는 70세였던 1938년에 은퇴하여 멜버른으로 돌아갔고, 그 이듬해인 1939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부임한 남궁혁(뒷줄 오른쪽) 목사와 함께한 마페트, 레널즈, 엥겔, 1925

권순형 편, <주야 나를 불샹이 넉여 도아주쇼셔>, 2009

호주 한국 선교 120주년 기념으로 엥겔의 일기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의 일기는 이미 출판된 적이 있었으나 2009년 데이비스 내한과 순직 기념으로 새로 편역되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