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평양의 장로회 선교사들]
탈식민주의 입장이든 보수적 신앙을 정당화하는 입장이든 전형적인 초기(1910년 이전) 내한 미국 선교사들을 (1919년 브라운 총무의 말을 인용하여) 보수적,전천년설론적, 청교도적 신앙 유형의 인물로만 보거나, (류대영 교수처럼) 중산층 가치와 자본주의적 삶을 이식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한국교회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의 약점은 선교사들을 동질의 한 그룹으로 본다는 점이다. 다른 약점은 시차를 고려하지 않고 1919년의 브라운 총무의 평가나 1920-30년대의 모습을 1900년대에 투사한 것이다.
런던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뉴욕에서 갑부의 아들로 자라 뉴욕대학교를 다닌 언더우드와 남북전쟁 후 중서부 개척지 시골에서 자란 마페트, 리, 클라크 등을 한 그룹으로 묶을 때, 이들의 문화적, 도덕적, 신앙적 특징을 자본주의 중산층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다.
매코믹신학교 출신인 평양의 마페트, 베어드, 리, 스왈른과 서울의 기퍼드, 무어 등은 미국 중서부의 시골 농부나 중소도시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경건한 가정 교육과 초중고 교육을 받은 후 장로교회가 세운 중서부의 작은 기독교 대학에서 부흥운동과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이재근, “매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와 한국 복음주의 장로교회의 형성, 1888~1939,” 『한국기독교와 역사』 35 (2011년 9월): 5-46.] 이재근 교수는 이들의 신앙을 “엄밀한 칼빈주의는 아니었던 온건한 보수적 복음주의”로 규정하고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체험, 윤리, 보수, 전천년설 종말 신앙의 소유자로 보았다.
이 가운데 보수신앙 측면이 언더우드나 에비슨의 기구주의와 달랐는데, 그들의 성장배경과 평양과 서울이라는 사역지 상황(위치,장소)이 달랐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서는 경쟁하는 세력(한국정부, 일본 불교, 프랑스 천주교, 영국 성공회, 러시아 정교 등 )이 많았기 때문에 근대화 문화 담론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평양 선교사들은 비교적 정치 바람이 약한 평양에서, 뉴잉글랜드 양키 출신 선교사들과 달리 기독교 문명이 아닌 순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대형 기구주의에 반대하고 토착 교회 설립을 우선 순위에 두는 네비어스 방법을 지지했다. (서울에서는 1897년부터 네비어스정책을 포기했다.) 그 결과는 서북 기독교의 급성장이었고, 다른 측면은 1920년대 이후 세대의 근본주의였다. [사실 1920년대 평양은 학교나 병원을 대형으로 만들어 문명론을 수용했다. 우선순위가 달랐다.] 문명이 복음을 배제하지 않듯이, "그리스도만"이 문명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서열적 공존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진보신앙과 보수신앙의 발전은 (1) 출신 지역과 성장 배경, (2) 서울과 평양이라는 공간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너무 신학교 출신만 따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엔 한 사람이 어디서 자라 어디서 공부하고 어디서 일했는지 그 위치와 공간(spartial factor)이라는 환경이 중요했다.
한국 선교 상황에서 다양한 그룹이 논쟁하면서 통합을 추구해 나갔다고 바라보는 것이 역사의 복잡성과 계속성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2017년 5월 15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국제학술대회 발표 논문 초안 2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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