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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장로회 선교사

백정 선교의 무어 목사

Rev. Samuel Forman Moore

사무엘 포맨 무어 목사 (1860. 9. 15-1906. 12. 22)


[참고 옥성득, “선교사 무어의 복음주의 선교신학” <한국기독교와역사> 19 ( 2003년 9월): 31-76.]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1092619


백정과 마포의 가난한 자들과 고통 받는 자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졌던 무어(모삼열) 목사. 

왜 그는 소외된 자들에게 전도하고 백정 선교를 하고 백정 해방 운동을 지지했던가? 

자료가 부족하지만, 짐작해 보면 다음 몇 가지가 그 동기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 그는 일리노이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 Grand Ridge에서 1860년 9월 15일에 태어났다. 그 마을이 타운이 된 것은 130년 정도이고, 지금도 인구는 500명 수준이다. 한 마디로 무어는 옥수수만 널린 들판을 보면서 자란 가난한 농촌 소년이었다. 현재 구글에 있는 그랜드릿지에 있는 장로교회는 2008년에 팔려 선물 가게가 되었다는데, 아마 무어가 이 작은 시골 교회를 다녔을 것이다. 대학도 College of Montana를 졸업했다.

 

(2) 미국 남북전쟁 전후 시골에서 자란 많은 이들이 미국이 급격히 산업화 도시화 세속화 될 때인 1890년대(the Gilded Age!)에 해외 선교사로 나갔는데, 그들은 여전히 90%이상 농민으로 구성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려는 순수한 마음이 강했다.

    

(3) 1892년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온 초기 장로교회 선교사들(기퍼드, 마페트, 베어드, 리, 무어, 스왈른, 테이트, 아담스, 샤프, 로스, 번하이즐 등)은 이런 시골이나 중소 도시 출신이다. 이들은 뉴 잉글랜드 대도시 출신 양키 선교사들(언더우드, 아펜젤러 등)과 달리 소위 기독교 문명론을 전파하는 대신 순수 그리스도 만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Not civilization, but Christ.) 대형 병원이나 학교를 통한 선교 방법론인 기구주의에 반대하고, 복음 만을 전해서 개종을 통한 교회 설립을 우선하는 네비어스 방법론을 지지했다. 


(4) 백정 전도야말로 순수 복음을 통한 개인의 변화, 변화된 개인을 통한 사회 변화라는 당시 복음주의 개인관, 사회관에 적절한 유형이었다. [*1884-1910년 내한 장로회 선교사 중 남자 선교사는 95명, 그 중 목사는 71명이었다. 맥코믹 출신은 18명으로 25.4%였다.]  

 

(5) 한국 장로교회 초기 선교에서의 갈등은 바로 이런 선교사들의 문화적 배경, 출신 지역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이들이 온건한 복음주의 노선의 맥코믹신학교(1920년대 이후 매코믹과 달랐다)를 나온 점도 중요한 배경이다.

 

(6) 그가 한국에서 목회한 교회가 곤당골교회로 주변에 가난한 자들과 백정이 많았다. 박성춘이 교인이 되고 백정 선교의 지도자가 되면서 그를 지지한 목사가 바로 무어였다.

 

(7) 그는 새우젓 장수와 염색쟁이, 갓바치, 기와와 벽돌 찍는 일일 노동자가 많은 마포와 영등포와 용산 등 한강을 따라 가난한 성문밖 사람들을 전도했다.

 

(8) 무어 목사의 인품과 성정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많았다. 그의 가족들도 모두 병약했다. 육체적 고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고 타인의 아픔에 동참하게 만든다.

 

(9) 자연 무어는 인정 많은 목사로 알려졌고, 1905년 경의선 철도 부설 때 강제 노동을 하던 황해도 교인들이 하소연할 데가 없자, 무어 목사에게 찾아와 도움을 구했다.


 미국 일리노이 그랜드릿지, 인구 500명 수준


그랜드릿지제일장로교회, 지금은 선물 가게가 됨


1902년 무어 목사 가족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무덤 묘비

 2016.04.26. 옥성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