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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문서, 성서, 번역

한국 교회의 첫 구약전서, 1911

[1] 
1882년 첫 한글 복음서인 로스의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나온 지 30년 만인 1911년 3월 한글로 된 첫 <구약젼셔>가 발행되었다. 1906년에 발간된 공인역본 <신약젼셔>와 더불어 공인역본 <구약젼셔>가 1911년에 발간되면서, 한국교회는 온전한 성경 전서를 한글로 읽게 되었다. 이를 1938년의 개역본과 구별하기 위해서 구역본이라고 부른다.

1911년 3월 일본에서 10,000부, 서울에서 10,000 부 초판 구약전서가 발행되었다. 당시 개신교인이 10만 명 정도였으므로 다섯 명 중 한 명이 가질 수 있었다. 한 가정에 한 권으로 보고 발행한 듯하다. 그러나 활자가 커서 <구약전서>만 해도 2,650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라, 상하 두 권으로 분책을 했다. 상권은 창세기부터 역대하까지 1,350면, 하권은 에스라부터 말라기까지 1,300면이었다. 가격이 1엔(50센트)이었지만 불티나게 팔렸다. 그만큼 말씀이 필요한 때였다.

왜 활자를 4호로 크게 찍어 페이지 수를 늘려 비용도 많이 들고 들고 다니기에도 불편하게 했을까? 바로 중년이 넘은 장년과 노년층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구약 성경을 처음으로 먼저 주고, 이어서 5호 활자로 찍어서 청년들에게 주었다. 

1911년 성경전서는 구약 두 권, 신약 한 권, 합 3권이었다. 신약이 1904년 판은 785쪽, 1906년 판도 비슷한 면수라, 신구약 성경 세 책을 합하면 전체 3,300쪽이 넘는 두께였다. 벽돌이 아니라 벽돌 두 장 높이였다. 당시 높은 목침과 비슷해, 야곱처럼 돌베개[부자만 사용하던 고급 베개였다!]는 아니더라도 1엔 성경전서 책베개는 할 수 있었다.^^  

[2] 그렇다고 해서 한국교회가 1911년 전에 구약을 읽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한문을 아는 자들은 처음부터 한문 문리본 성경전서를 읽고 있었다. 선교사들도 영어 성경으로 설교하고 가르쳤다. 한국인 조사, 목사, 장로 들도 한문 성경으로 구약을 읽었다. 따라서 1911년 이전 한국 교회에 구약이 없었다고 말하면 틀린 말이다.  

[3] 그래도 1911년 구약전서가 나오기 전에 일반 교인들은 구약을 읽지 않았는가?

읽었다. 신약처럼 4복음서 단권성경을 먼저 찍고 서신서도 단권으로 찍듯이, 구약도 창세기와 시편을 먼저 발행했다. 다음은 1906-1910년에 발행된 단권 구약 책들이다.    이런 단권은 임시본으로 출간되었고, 1911년 공인역본을 낼 때 일부를 수정해서 본문을 확정했다. 

1906년 11월, 창세기, 151쪽, 일본 요코하마, 2,5000부. 반포는 1907년 1월부터  

1906년 12월, 시편, 296쪽, 일본 요코하마, 25,000부, 반포는 1907년 1월부터.   

1907년 사무엘 전, 사무엘 하, 잠언

1908년 출애굽기, 열왕기상하, 이사야, 말라기

이후 다른 단권은 발행하지 않고 바로 1911년 구약전서 발행으로 넘어갔다. 즉 1906-08년 3년 간 실험적인 임시본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잠언, 열왕기 상하, 이사야, 말라기를 번역 출판한 후, 선교사들과 독자들의 반응을 반영하고 수정하여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에 전주의 레널즈는 서울에 있는 밀러 총무에게 "번역 다 되엇소"라고 전보를 보낼 수 있었다. 구약 번역 10년만에 완성된 일이었다. 실로 파나나 운하보다 더 어려운 작업, 한글 성경 번역이 1910년에 완성되고, 1911년에 출판되었다. 

이상은 내가 쓴 <대한성서공회사 II> (1994), pp. 27-82에서 보고 간단히 줄였다.  

[4] 부흥 운동과 구약 성경

1903년 여름 원산 부흥부터 1907년 1월 평양 대부흥까지, 한국 교회 대부분의 신자는 신약 성경만 읽고 공부했다. 비록 한글 <창세긔>와 <시편>이 1906년 말에 단권으로 발행되었지만, 1907년 1월에 아직 반포되지 않았다. 따라서 1903-07년 대부흥 운동은 신약 성경만 공부한 사경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최근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이들이 또한 1907년 대부흥을 강조한다. 그러나 1907년 1월 사경회 때 교인들의 손에는 창세기가 없었다. 창세기 1장을 온전히 읽은 교인은 거의 없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분명했고, 창조 신학이 신앙의 출발점이었지만, "창조과학"은 시쳇말로 듣보잡이었다. 창세기 1장을 문자대로 믿지 않아도 창조 신앙은 가능하며, 성령체험도 가능하고, 교회 부흥도 가능하다. 창세기 1장을 문자대로 믿지 않아도, 로마서나 복음서만 읽어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바른 신앙을 가지고 성령에 충만하여 회개 운동, 도덕 운동, 교회 부흥 운동, 국권 회복 운동에 나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