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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신문 칼럼과 보도문

인터뷰, <매일경제>, 2020년 3월 14일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20/03/265502/

종교가 대중을 걱정하는 시대가 아니라 대중이 종교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다. 인간의 심성을 정화시키고 영적인 평화로 이끌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인간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기독교가 비판의 도마에 자주 오르내린다. 연일 쏟아져나오는 성직자들의 비리, 세습과 내부 권력 다툼, 목회자의 정치세력화, 소외된 이웃에 등을 돌린 오만함, 선교와 외형에만 치중하는 성장주의 등 지적되는 기독교의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기성 기독교의 위선에 지친 사람들은 쉽게 신흥 분파에 눈을 돌린다. 올 들어 코로나19 감염 확산으로 뉴스의 중심에 선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도 그중 하나다.

한국 개신교가 이렇듯 신뢰를 잃어버린 이유는 뭘까. 그 대답을 듣기 위해 미국 UCLA 석좌교수로 있는 한국 기독교사 연구 권위자 옥성득 교수(61)에게 다급한 이메일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옥 교수는 무겁고 예민한 질문에 정성스럽게 답을 보내왔다.

A4 용지 8장에 달하는 긴 답변을 요약 정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에 몰입하게 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욕먹을 소리지만 세속화된 개신교회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 위선, 무례한 태도, 인문학적 소양 부족, 성장주의. 중대형 교회의 세습 같은 문제들 때문에 교회들이 사회적 자본을 잃어버렸다. 신용도가 낮아진 것이다. 여기에 50대 이상 장로들이 의사 결정을 독식하면서 젊은 신도들이 교회를 떠났다. 그 사이를 파고든 것이 신천지다.

신천지가 사람을 끌어들인 요소들을 보라. 그들은 신규 교육생에 대한 친절과 유대감으로 무장하고 있다. 복음서와 계시록에 대해 자기들 나름의 스토리텔링도 갖추고 있다. 진지한 조직을 통해 신도들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든다. 모두 개신교회들이 놓치고 있던 것들이다.

신천지는 이런 방식을 토대로 양극화 사회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배타적 집단구원을 약속하면서 세를 확장했다.

―신천지가 한국 개신교의 토양을 모두 부정한 것인가.

▷아니다. 신학과 과학을 무시하는 반지성주의, 일상을 무시한 채 영적구원에 매달리게 하는 종교 환원주의 등 일부 한국 대형 교회들의 잘못된 토양을 답습한 측면도 있다.

―신천지의 유지 방식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신천지 교도에게는 종교적 헌신은 있으나 건전한 일상이 없는 경우가 많다. 종교적 열정과 내부 결속을 유난히 중시하기 때문에 일상의 부재, 가족의 부재, 노동과 쉼의 부재가 있을 수 있고 진리에 대한 독점의식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이 코로나 확산 문제와 같은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 아니었나 싶다.

―한국 개신교에서 유난히 신흥 종교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한국은 미국 기독교로부터 근대성과 문명을 많이 배웠다. 미국 개신교는 국가주의 교회인 유럽과 달리 개별 교파주의 교회다. 즉 하나의 교파가 진리를 독점하지 않고 성서 해석과 의례를 달리하는 여러 교파가 공존하는 구조다.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워낙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다 보니 새로운 교파가 생겨나도 그 교파를 `이단`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미국 개신교 영향을 받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분파들이 하나의 교파로 위장하기 쉬운 환경이다.

한국 사회의 특징도 한몫했다. 경쟁이 치열하고 사회가 불안정한 한국에서 대중은 쉽게 격변적인 종말론과 장밋빛 환상에 심취했다.

―최근 코로나 확산 문제로 종교행사 자제를 요청하는 당국과 예배권을 주장하는 개신교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한국 개신교회는 십계명에 있는 안식일 성수(聖守) 조항을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지나치게 동일시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할 안식일이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날이 된 측면도 있다.

교회가 주일 예배에 집착하는 것은 성장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도와 외형에 치중하다 보니 교인 수와 헌금액이 목회 성공의 척도가 됐다. 이 때문에 언행일치의 목사보다 언변이 뛰어난 목사가 득세했고, 교인들도 화려한 건물과 음악, 웅변 같은 설교가 있는 대형 교회에서 예배를 보면서 신을 제대로 모셨다는 착각에 빠졌다.

전쟁 때나 식민 치하에서도 교회가 예배를 거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건 교회사를 잘 모르는 이야기다. 1919년 3·1운동 직후 많은 교회들이 한 달 이상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당시 교회들은 공의를 위해 예배를 희생했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신사참배에 반대한 교회들이 문을 닫고 가정예배를 드렸다. 유일신을 지키는 것이 예배라는 형식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교회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다른 원인도 있다. 300개 중대형 교회들이 경쟁하는 구도가 되면서 공공성이 약화됐다. 폐쇄적 이익집단화되면서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것이다.

―대형 교회 세습 문제로 한동안 시끄러웠는데.

▷세습은 과거 패러다임을 지속하면서 미래 세대를 포기하는 일종의 자살골이다. 세습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비성경적이고 불신앙적인 관행이다.

―태극기 집회에 개신교 신자들이 많다.

▷다수 개신교가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전광훈 목사의 경우는 그 행적이 목회자보다는 정치인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최근 출간한 `한국 기독교 형성사`에서 타 종교에 배타적인 개신교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1910년 이전 그러니까. 초기 한국 개신교는 열려 있었다. 온건한 복음주의를 걸으며 타 종교를 포용했다. 그러던 것이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가 유입되면서 전투적인 배타주의가 장로교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반공이념으로 무장한 근본주의까지 섞이면서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 됐다.

―`한국 기독교 형성사`를 쓴 계기는.

▷한국 개신교에는 한국의 상황에 맞는 자기 신학이 없다. 보수파는 한국 교회가 보수적인 복음주의였다면서 그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유파는 초기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이제 벗어나야 한다고 강변한다. 두 가지 분석 모두 너무 현재주의적인 해석이다.

책을 쓰면서 1차 사료를 연구해보니 한국 초기 기독교는 매우 유연함을 지니고 있었다. 복음과 자유가 함께 있었고 전통 종교의 선한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정치적으로는 현실적 민족성을, 사회적으로는 약자를 배려하는 참여성을,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정체성을 한국에 적응시킨 토착성을 지니고 있었다.

책을 통해 식민 통치와 전쟁, 그리고 교단 분열을 거치면서 사라져 버린 한국 기독교 초기 유산을 살려내려고 애썼다. 요즘 교회가 지닌 배타성, 몰역사성, 수입신학 의존성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싶었다.

―코로나 확산 이후 한국 개신교계에 어떤 변화가 예상되나.

▷공중 예배가 중지되면서 그동안 안일했던 신앙 생활에 대한 성찰이 생긴다면 좋을 것 같다. 그를 통해 교계와 교회 생태계를 건전하게 지키는 데 노력하는 분위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신흥 종교집단에 대한 학습 효과로 교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 종교 전반에 대한 혐오나 불신이 증폭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사실 많은 지식인들이 리처드 도킨스의 무신론에 열광한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 종교의 가치는 무엇인가.

▷제도 종교에 실망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무신론에 열광한다기보다 정당성과 가치를 상실한 구태의연한 종교를 떠나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종교의 가치는 어지러운 시대에 빛날 수 있다. 종교는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같은 거다. 인간은 물리적인 부와 이웃과의 관계만으로는 살 수 없다. 그것을 넘어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과 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초월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다.

코로나 확산 사태에서 보듯 일상을 유지하던 시스템이 무너지는 위기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와 존재가치, 선과 악, 삶의 목적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지점에 종교가 필요하다.

―기독교 학자가 된 계기는.

▷고향이 거제도인데 할머니가 1910년대 호주 선교사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교인 집안이었다. 서울대 영문과를 다녔는데 3학년 때 당시 해직 상태였던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님을 만나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도우며 한국교회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 처음 맡은 일이 아펜젤러의 일기와 편지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영문학과를 마치고 국사학과에 편입해 본격으로 기독교사를 연구했고, 장신대에 가서 5년 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9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에서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걸었다. 교회사 연구를 통해 한국 교회의 역사의식을 제고하면 사회개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자로서 근황은 어떤가.

▷2002년 UCLA에 왔고 2011년 종신직 교수가 됐다. 지난 5년 연구를 분석해보니 총 7100쪽을 출판했다. 하루 평균 5쪽씩 책을 쓴 셈이다. 개신교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역사 연구에 몰두하는 게 내 일이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불로그를 통해 한국기독교사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데 하루 평균 800명이 방문한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신도 천만을 자랑하던 개신교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사 학술대회를 많이 조직하고 싶다. 소장학자들을 키워서 한국 기독교학을 정식 학문 분야로 확립하고 싶다. 한국기독교사와 북한기독교사를 영어로 저술하는 일을 꼭 하고 싶다. 한국 기독교와 세계 기독교를 연결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서 일하고 싶다.

▶▶ He is…

1959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국사학과에 편입해 교회사 연구를 시작했다. 장로회신학대 대학원을 마치고 1993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석사)와 보스턴대(박사)에서 기독교사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교수로 동아시아 기독교사, 한국 기독교사 등을 가르치고 있다. `대한성서공회사`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한국 기독교 형성사` 등을 출간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