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의례, 예배, 설교

예배의 중요성

#옥묵상
사람은 의례로 산다. 예배하는 존재이다. 종교와 신앙의 핵심은 의례이고 의례에서 상당수 교리가 나온다. 제도 종교에서는 교리가 의례를 규정하고 통제한다. 하지만 의례는 변한다. 상황이 변하고 새 환경에서는 새 의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월절이 수난절이 되고, 동지가 성탄절이 되고, 제사가 추도식이 된다. 의례는 종교문화 상황에 토착화한다. 의례도 변하고 교리도 변한다. 의례의 역사와 교리의 역사는 상호 긴장 관계에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배 의식 없이 머리로만 믿고, 몸과 행위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의식 없이 지적 심리적 종교인으로만 산다면, 그것은 예배당에 가지 않고 가상 공간에서만 예배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로 모여서 함께 의례와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전제로 하자. 

최근 코로나 사태로 논의하는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의 문제는 한가한 지적 신학적 유희가 아니다. 예배가 없는 신앙은 없으므로, 그 예배(기도, 설교, 헌금, 성찬식, 세례식 등)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 가상 공간에서도 가능한가, 페이팔 헌금이 가능하다면 왜 사이버 성찬식은 안 되는가와 같은 질문은 숙고하고 총회나 노회나 교회가 사전에 안내문을 미리 만들어 놓았어야 할 중대한 사안들이다. 없다면 며칠 안에 내어 놓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가상의 우주적 몸이다. 보이는 교회가 전부라면 우리는 한국 교회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크고 넒고 길고 높고 완전한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그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한다.

전염병으로 예배당에서 모이지 못하더라도 어떤 형태의 예배이든지 예배는 드려야 한다. 고난주간도 보내야 하고, 부활절도 지켜야 한다. 주일 예배를 연기할 수 없듯이 부활절도 연기하는 것보다 가정 예배를 어떻게 드릴지에 대한 교단별 지침서가 필요하다. 가족끼리 카톡을 하듯이,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간의 예배 안내서도 있으면 좋을 것이다.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가고 수 억 명이 일거리를 잃는 상황인데, 왠 예배 논쟁인가라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장에서 채플린이 어떤 색깔의 스톨을 할 것인가나 중세 시대 바늘 위에 천사가 몇 명이 설 수 있는가와 같은 신학적 유희와 달리, 가상 예배와 의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유대교인, 기독교인, 무슬림 등 의료진과 환자와 잠재적 환자들인 인류의 대부분이 매일 혹은 매주 행하는 의례에 대한 실제적인 일상의 문제요, 생존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논쟁이 아니라, 신학함이요 신앙함이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면, 물 대신 모래로 줄 수 있다는 말을 읽을 적이 있다.

비상 상황에서는 비상한 수단으로 의례를 행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비상이 일상이 된 21세기이다. 우리는 온라인 사이버 공간에 매일 연결되어 산다. 가상 공간이 일상 공간이다. 줌 예배를 드리고 가상 성찬식을 드리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 죽어가는 자들일수록 예배와 기도가 필요하다. 무엇으로 죽어가는 영혼이 힘을 얻고 살 수 있는가? 교리인가? 마스크인가? 교단에서는 신속하게 지침서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의례는 우리가 무엇을 섬기는가를 몸으로 드러내는 습관적 행위이다. 매일 스마트 폰에서 우리는 무엇을 섬기는가?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고 무엇을 읽고 무엇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가?) 그 죄악이 넘치는 공간에 예배가 들어갈 때 어떤 형태와 내용이 좋은가는 계속 업데이트해야 한다. 줌 예배 1.0이 가을에는 2.0이 될 것이다.

우상(나, 자아, 내 교회만)을 섬기는가? 세상과 이웃을 사랑하시는 우주적 하나님을 섬기는가?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될 것이다. 장소나 전통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