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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장로교인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장규식, “‘조선의 간디고당 조만식,” <내일을 여는 역사> 26 (2006년 겨울): 84-97. 

분단 극복'의 지평에서 다시 읽어야 할 조만식

자그마한 키에 무릎을 치는 깡똥한 검정 무명 두루마기, 말총 모자에 편리화박박 깎은 머리에 수물수물 얽은 얼굴나지막하고 허스키한 목소리. 지인들이 떠올리는 조선의 간디고당 조만식의 모습이다. 

고당 조만식(1883- 1950)은 흔히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에 비견된다. 상인 집안 내지 그 카스트 출신으로 식민 본국의 심장부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한 이력이라든지, 일상에서 몸소 토산 장려의 모범을 보이며 민중의 교사로 나선 점에서, 그리고 강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비폭력 무저항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간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꼴이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비슷한 것이 두 사람의 최후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간디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시크교도가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하나 된 인도의 건국을 소망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간디의 바람과 달리 힌두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와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이 각각 분리 독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인도 각지에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때 간디는 두 종교의 화해와 공존을 외치며 마지막 단식에 들어갔다. 그의 단식으로 악화일로에 있던 종교 분규는 점차 진정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1948130일 간디는 반이슬람 힌두교 근본주의자가 쓴 총탄에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주검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평화를 되찾는 제물로 불살라졌다. 

고당 조만식 또한 간디와 마찬가지로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이 한창이던 195010월 민족의 제단에 자신의 한 몸을 바쳤다. 해방 후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서울로 눈길을 돌리며 저마다의 정치적 야심을 불태울 때 그는 자신의 삶의 터전인 북녘 땅의 민중과 더불어 묵묵히 새 나라 건설의 과업을 수행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이후 38도선 이북을 통치하는 소련군 당국과 갈등을 빚어 숙소인 고려호텔에 연금당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는 주변의 월남 권유를 거부하고 홀로 평양에 남았다. 이북의 동포를 버리고 나 혼자 살자고 월남할 수는없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고당 조만식은 주로 월남자의 시각에서 반공 투쟁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정작 조만식 자신이 반공을 목 놓아 <86> 외친 적은 없었다. 해방 후 소련군 당국과 공산주의자에게 적지 않은 핍박을 받고 또 희생을 당했지만, 그가 내세운 것은 언제나 민족의 인화 단결이었다.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 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출범할 때 조만식은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평양지회의 회장을 맡아 지역의 민족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데 앞장섰다. 또 해방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을 때도 좌우익을 망라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인화 단결의 모범을 보였다. 

그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면 아마도 월남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민족이그동안 온갖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북녘 땅의 민중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래서 기꺼이 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그 고난이 민족의 통일을 알리는 부활의 새벽으로 이어지길 희망하며 자신의 한 몸을 희생 제물로 내어 놓았다. ‘분단 극복이라는 지평에서 조만식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것은 조만식의 삶과 사상을 온전히 재구성하는 첫 단추이기도 하다.

 

평안도 상인의 후예

고당 조만식은 188321일 아버지 창녕 조씨 조경학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경건 사이에 외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조만식의 아버지 조경학은 매년 벼 100섬을 거둬들이는 평안도 강서 출신의 향반(鄕班) 중소 지주로평양에서 일종의 위탁판매업이라 할 수 있는 물산객주 일을 하는 상인이었다. 

<87> 조만식이 평안도 상인의 후예로 그 자신이 15세부터 22세까지 평양 종로 거리에서 포목점과 지물포를 경영한 사실은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평안도는 상공업의 발달로 조선 후기 들어 경제적으로는 전국 8도에서 가장 번창한 지방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차별을 받아 평안도 출신들은 설사 과거에 합격을 해도 정6품 이상의 관직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양반 사족 지배 체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그 결과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평민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조만식의 아버지처럼 지역에서 양반 행세하는 향반들이 있었지만, 뒤에 상업에 종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일반 평민들과 살아가는 방식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평안도에서 이 같은 평민 문화를 이끌어간 것은 이른바 자립적 중산층이라 불린 중소 상공인 -중소 지주" 자작농 같은 신흥 사회 세력이었다. 그들은 서당 교육을 통해 일정한 지식을 갖추고힘써 일해 자신들의 생계를 직접 꾸리며 평안도 특유의 평민적 자치 질서를 만들어 나갔다. 개항 이후 사랑의 평등 윤리를 설파하는 기독교를 먼저 받아 들여 지역에 널리 퍼뜨린 것도 그들이었고, 신교육과 민족의식을 널리 보급하여 평안도를 근대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한 주역도 그들이었다. 평안도 상인의 후예 조만식은 도산 안창호남강 이승훈이 그러했듯이<88> 평민의 땅 평안도가 낳은 인물이었고평안도의 평민 문화를 선도한 자립적 중산층을 대표하는 민족 지사였다. 

 

1935년 도산 안칭호 출옥 당시. 좌로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그러나 조만식이 어릴 적부터 그 명성에 걸맞게 비범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조만식은 괄괄한 성격에 씨움꾼으로 유명하였다. 비록 몸집은 작았지만 몸이 여간 날랜 게 아니어서 늘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다. 특히 요즘 태권도와 비슷한 일종의 호신 무술인 날파람에 능해 날파람의 명수로 통했다. 또 해마다 음력 정월에 평양 주민이 성내군과 성외군으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을 하며 대항하는 격렬한 민속경기인 평양 석전의 열렬한 응원꾼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5세에 서당을 그만두고 평양 종로 거리에 포목점을 내면서는 상인들 사이에 술 잘하고 잘 노는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때 그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고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며 비분강개하는 지사도 아니었다. 그저 평양 저잣거리의 한낱 장사꾼이었을 뿐이었다. 장사를 하며 그는 며칠 밤을 새우며 술을 마시기도 했고때로는 술이 과해 길바닥에서 하늘을 이불삼아 노숙을 하기도 했다. 담배도 골초여서 특제 큰 담뱃대에다 성천초 세 잎사귀를 꽁꽁 말아서 석 대를 피운 뒤에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정도였다. 기생집 출입도 잦아 그때 배운 가락으로 나중에도 수심가 한마디는 썩 잘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기독교를 믿고 새 사람이 된 것은 러일전쟁을 겪으면서였다.

 

심기일전새로운 세계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조만식은 장사를 그만두고 가족을 따라 대동강 중류의 베기섬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 무렵 그는 기독교에 입교를 한다. 전쟁을 겪으며 인생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서였는지, 상인 시절 방탕한 생활에 대한 반성에서였는지 분명치는 않지만,기독교에 입교한 조만식은 신학문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그러한 깨달음은 그를 만학의 길로 이끌었다 

조만식이 숭실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은 기독교에 입교한 다음 해인 1905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숭실학교에 무등반 그러니까 1학년 예비 과정으로 입학한 조만식은 이후 술 담배를 끊고 학업에 정진해 남 같으면 5년 동안 공부해야 할 것을 월반해서 3년 만에 졸업하였다. 승실학교의 설립자 베어드에게 사회봉사와 민족 구원의 신앙을 전수받고독실한 신앙인으로 민족의식에 눈을 든 것도 이때였다. 

1908년 봄 평양 숭실학교를 5회로 졸업한 조만식은 교원 생활을 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친 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동경에서 조만식은 먼저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영어와 일본어수학 등의 과목을 익히고19104월 메이지대학 明治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동경 유학 시절 조만식은 한인 교회의 영수로기독교 청년회YMCA의 회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가 영수로 시무한 동경 한인 교회는 장로교단 소속으로 19095월 설립되었는데그 뒤 감리교 출신 유학생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교파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유학생들이 장로교와 감리교로 나뉘어 각기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목격한 조만식은 1911년 여름 유학생들을 설득하고 본국의 두 교단 본부에 청원하여 한국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재일본 동경 조 선예수교 연합교회라는 이름의 장감 연합교회의 설립을 이끌어냈다. <90> 나라까지 망한 마당에 이국땅에서 교파 문제로 우리가 분열된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조만식은 지방별로 나뉘어 따로 놀던 동경 유학생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동경 유학생 사회에는 서북놈기호놈 하는 식의 망국적 지방 할거주의가 만연하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민족의 독립도 요원하다고 본 조만식은 고향을 묻지 말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1911년 겨울 전라도 출신의 송진우경기도 출신의 안재홍과 힘을 합쳐 출신 지방별로 나뉘어 있던 유학생회를 하나로 묶어 조선유학생 친목회를 결성하였다. 비록 조선 유학생 친목회는 1912년 봄 일제의 탄압으로 창립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강제 해산을 당했지만1913년 가을 재일본 동경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발족으로 이어지며 훗날 2.8 독립선언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게 조만식은 교파와 지역을 뛰어넘는 유학생 사회의 인화 단결을 이루어내며 자신의 민족 구원의 신앙에 인화라는 화두를 덧붙였다. 

오산학교에서의 8

1913331세의 늦은 나이에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조만식은 가족들과 묵은 회포를 풀 새도 없이 그해 4월 반도 한 귀퉁이 평안북도 정주에 위치한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낮은 데로 나아가 청산맹호식의 평민 정신과 자립 자존의 민족정신과 참과 사랑의 기독 정신을 가르치는 민중의 교사로서 공생애를 시작한 것이다. 

<91> 당시 오산학교는 설립자 이승훈이 신민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학교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조만식은 그런 학교에 부임하여 봉급도 받지 않고 교사로교장으로 만 8년 동안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봉직하면서 학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오산학교에서 조만식은 교사로교장으로교목으로사감으로사환으로 15역을 담당하며 학생들에게 일상에서의 실행과 모범의 위력을 가르쳤다.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기숙사에 기거한 것은 물론오전 6시 기상에서 오후 10시 취침까지 모든 일정을 같이 소화하면서 솔선수범의 본을 보였다. 학생들과 같이 일어나 체조하고 뒷산을 뛰어 돌았으며, 아침 기도회를 인도하고잠자리에 들기 앞서 뜰을 돌며 같이 교가를 불렀다. 겨울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하러 갈 때도 동행해서 함께 일을 했다. 

훤칠한 외모나 화려한 언변이 아닌검소한 생활 태도와 몸소 본을 보이는 실천궁행으로 민중의 신임을 얻은 진실의 사람실천의 사람으로서 그의 면모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것은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의 삶의 자세이기도 하였다. 이승훈은 학교에 사환을 따로 두지 않고 변소 치는 일에서 밤에 기숙사 군불 때는 일까지 학생들과 함께하는 솔선수범을 통해 학생들에게 근면과 신의열과 성그리고 일상생활의 도리를 가르쳤다. 그가 학생들에게 지적하는 것은 왜 걸음걸이가 그 모양이냐왜 목소리에 힘이 없느냐, 큰일을 할 학생들이 어째 그렇게 기상이 늄름하지 못하냐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다. 가르치면서 배웠다고나 할까조만식은 그러한 교풍 밑에서 의복에서 일용품에 이르기까지 토산품을 사용하고 몸소 생활개신을 실천궁행함으로써 훗날 물산장려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될 수 있었다. 

시민사회의 개척자

지금도 조만식 하면 물산장려운동을 떠올리듯이조만식이 민족 지도자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평양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면서부터였다. 그가 조선물산장려회를 처음 발기한 것은 19207월이었다.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3.1 운동 직후 중국 망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과 일본인 상인들의 방해로 실패하고19213월 평양 YMCA 총무로 취임하면서 다시 추진하여 1년여의 산고 끝에 19226월 드디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물산장려운동은 조만식이 오산학교 교장 시절부터 평소 생활신조로 실천해 오던 것을 사회에 널리 보급하여 대중적으로 조직화한 운동이었다. 그가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평양조선물산장려회 취지서>에는오늘날 상공업이 발달한 선진국들도 저마다 모두 보호무역주의를 행하는데나라를 잃어 법령이나 정책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자위상 불가불 민간의 공덕심과 공익심에 의지한 보호무역 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을 제창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대목이 있다. 나라가 없다고 손 놓고 있지 말고, 민간 차원에서라도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조만식을 시민사회의 개척자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인데실제로 그는 평양 YMCA 총무로 취임한 1921년 이래 평양 사회에 무관의 제왕으로 군림하면서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직접 챙겼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어 김동원, 오윤선 장로와 함께 평양 사회와 기독교계를 이끌었으며1923<93> 조선민립대학 기성회가 창립되었을 때는 중앙 집행위원 겸 지방 순회위원으로 평안도 일대를 돌며 선전 강연과 모금 운동을 벌였다. 1927년에는 숭인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재정난에 빠진 학교를 상업학교로 탈바꿈시켰고1931년에는 관서체육회의 회장에 취임하여 민간에 체육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일제 권력과 무관하게 평양의 조선인 사회를 조직하여 자율적으로 고아원과 공회당과 도서관을 세우고평양 상공협회를 설립하였다. 그 결과 일제 침략하에서도 평양은 여전히 조선 사람의 평양으로서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민경제주권 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이 유독 평양에서 꾸준하게 전개되며 미흡하나마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조만식이 이끄는 평양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시민사회적 활력 때문이었다. 19231월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물산장려회가 토착 자본가의 배만 불리는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 부딪혀 창립 1년만에 조직조차 유지하기 힘든 지경에 빠진데 반해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는 1937년 일제 당국에 의해 해산당할 때까지 흔들림 없이 꾸준한 활동을 벌였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온갖 정치적 차별을 받으며 형성된국가에 대해 민간 사회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평안도의 평민 문화, 그리고 그것을 대중적인 사회운동으로 조직한 조만식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조만식은 평안도 사람이었다. 그의 민족운동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평안도를 토양으로 해서 싹트고 꽃을 피웠다. 그는 일본 유학 5년간과 193211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서울에서 보낸 9개월간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를 떠나지 않았다. 가장 토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듯이그는 <94> 평안도라는 민중의 삶의 자리에 굳게 서서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거창한 말 대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민족의 앞길을 하나하나 개척해 나갔다. 

지조의 사람, 인화의 사람

나라가 없으면 민간 차원에서라도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며시민사회의 튼실한 기초 없이 제대로 된 독립국가의 건설은 기대할 수 없다며 시민사회 운동에 앞장서고무력 저항이 아닌 비폭력 무저항의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조만식을 타협적인 민족운동가 쯤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승훈이 벽창호라고 놀릴 정도로 원칙을 중시하고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지조의 사람이었다 . 물산장려운동의 상징이 된 그의 짧은 무명 두루마기와 말총 모자그리고 한지로 만든 명함은 그 자체가 일제 총독부 권력에 대한 비타협의 몸짓이었다. 일제 권력이 뭐라 하든 개의치 말고 우리 식대로 살자는 비타협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 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앞장섰고평양지회의 회장을 맡아 평양 지역의 비타협적 민족운동 전선을 이끌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연이어 도발하며 말기적 발악을 하던 일제가 전시 총동원 체제에 협력을 강요하며 온갖 회유와 탄압을 가해 올 때도 그는 흐트러짐 없이 의연하게 비타협의 입장을 견지했다. 조만식은 평소 말없이 주로 상대방의 말을 듣는 편이었지만아니라고 해야 할 때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조용히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해방 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반대 입장을 철회하라고 소련군 사령부와 공산당 쪽에서 압력을 가할 때도 그는 가만히 앉아 그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듣다가 조용히 아니라고 해 버렸다. 

한편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다고 해서 조만식을 토착 자본가의 이해만을 대변한 민족운동가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주변에는 김동원과 같이 토착 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도시 서민과 소농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회계층을 함께 아우르려 했다. 그가 총무로 있던 평양 YMCA 회관에는 명망가들뿐 아니라 억울한 호소나 딱한 의논을 하러 오는 사람자녀들의 학업 문제 때문에 속을 썩는 학부형다른 지방에서 처음 평양을 찾은 사람심지어 집나간 아내 문제로 상심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는 그들에게 믿고 기델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었고인화의 정신으로 평양의 조선인 사회를 하나로 엮어 나갔다. 그래서 그는 해방 직후 38도선 이북 지역에서 좌우익 모두에게 신망을 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조만식의 직계 제자라 할 배민수. 유재기 등이 1929년 평양에서 조직한 기독교 농촌 연구회가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사상 경향을 띠었던 것도 그와 관련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민족의 십자가를 한 몸에 지고

해방 직후 조만식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소련군이 진주한 이후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반반씩 참여하여 <96> 구성된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45113일에는 민족 독립남북통일민주주의 확립을 정강으로 하는 민족주의 정당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당수에 취임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60 노구를 이끌고 좌우익 세력을 하나로 묶어 하나 된 나라 건설의 기초를 다지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194512월 말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의 그 같은 노력은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소련 측에서 후견제로 표현한 3상회의 결정의 신탁통치 조항에 완강한 반대 의사를 표한 결과 자신의 숙소인 고려호텔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194615일 개최된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전체회의가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좌우익의 찬반 의견이 엇갈려 결렬된 직후의 일이다.  

해방 직후 소련 군정 주선 아래 조만식과 김일성의 역사적 첫 만남. 

그런데 조만식이 그토록 완강하게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한 데 대해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월남자의 시각에서 그려진 모습과 달리해방 직후 조만식의 행보는 중도 우파에 가까웠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무신론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사회주의 사회 정책에는 호의적이었다.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시정대강을 작성할 때도 토지개혁 자체에 반대한 보수파 인사들과 달리 그는 <97> 그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랬던 그가3상회의 결정에 임시민주정부를 먼저 구성한다고 한 데 주목하여 일단 남북에 걸친 통일 임시 민주정부를 구성하고신탁통치 제안서를 작성하는 과정에 최고 5으로 정해진 기간을 없애거나 안 되면 최소한으로 줄여 보자는 절충안을 내놓은 남한의 중도 우파 인사들과 달리그에 대해 완강한 반대 입장을 고수한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아마도 그는 신탁통치 문제를 일제하에 제기된 자치론과 비슷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자치론에 대해 그랬듯이 신탁통치 주장을 독립을 유보하자는 주장으로 받아들이고신간회 당시와 마찬가지로 비타협 무저항의 시민불복종 노선을 걸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후 조만식은 연금 생활이라는 고난에 찬 말년을 보내야 했다. 주변 인사들의 월남 권유도 거절하고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겠다고 번의만 하면 북한 지역 최고 지도자의 지위와 권한을 넘길 용의가 있다는 소련군 당국의 회유도 거부한 채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 와중에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쳤다. 

그가 월남을 거부한 것은 북녘 땅의 민중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북한 지역 최고 지도자의 유혹을 뿌리친 것은 반쪽짜리 분단 정부에 대한 거부였다. 민족 분단의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분단 체제가 굳어져 가는 속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 십자가를 지는 것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민족 분단의 현실이 봉합될 수만 있다면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심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으로 통일의 새벽을 내다보며 분단의 십자가를 짊어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주검의 부활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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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규식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일제하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서울공간으로 본 역사) 등의 저작이 있다. 한국 근현대 지형사와 도시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