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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장로교인

이약신 목사 생애 1, 1937년 호주 방문까지

이약신 목사의 생애 1, 1898-1937

평안도 청소년 시절 

이약신(1898~1957)1898425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용동)에서 아버지 이병승과 어머니 박은승의 여섯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소농으로 한학과 유교에 독실하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하고 위패를 불태웠다. 그래서 태어난 딸은 애시(愛施)로 아들은 약신(約信)으로 지었다. 곧 이약신은 모태 신앙인으로 자랐다.

그러나 약신이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년 후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누나 애시가 가산을 정리해서 서울 세브란스 간호학교에 입학하고, 약신은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오산에서 남강 이승훈, 춘원 이광수를 만나 민족혼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경남 웅천읍에서 유학을 온 주기철(1897년생)을 만났다. 주기철과의 만남은 나중 약신이 마산으로 내려와서 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약신은 바리톤으로 노래를 잘 불렀고, 오르간과 영어를 잘 했으며, 축구와 농구를 잘하여 축구 선수와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오산중학교 제7회 졸업 사진. 앞에서 둘째 줄 왼쪽 끝이 이약신 목사이며, 세 번째가 주기철 목사이다.  ⓒ이은화 교수

경남 웅천에서 교사 생활, 결혼과 일본 유학과 사업 

약신은 19163월 오산중학교를 졸업(19)하고 경남 웅천으로 내려와 웅천 개통보통학교의 교사(18)가 되었다. 이듬해 1917년 약신은 마산의 거부인 이상소 씨의 딸 이옥경과 결혼을 했다. 이상소는 1914년 호주선교사 라이얼(David M. Lyall 라대벽)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집사로 봉사하다가 1919년 문창교회 장로가 된 분이다. 그 딸 이옥경은 미인이었으나 다리를 저는 불구로 결혼이 쉽지 않았다. 이상소는 그에게 좋은 남편감을 수소문하던 중, 고아이지만 전도가 유망한 약신을 알게 되었다. 이상소는 우선 약신에게 딸의 사진만 준 후에, 만나서 사위로 삼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약신은 이옥경을 만나지 않은 채 사진만 보고 결혼을 약속했다. 약신은 결혼식 날 처음 옥경을 보았으나 결혼을 물리지 않았다. 이상소는 사위 하나는 잘 보았다.

약신은 결혼 후 1918년 장인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일본 동경에 유학을 갔다. 3월에 동경 중앙대학 상과에 입학하여 2년간 무역과 경제를 공부했다. 동경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삼일운동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옥고를 치르는 일은 없었다. 이약신은 미국인 교수들의 강의를 소화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며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마산으로 돌아온 이약신은 장인과 함께 유기(brass) 공장을 운영했다. 정직한 약신은 그릇에 흠이 있으면 팔지 않으려고 했으나, 장인은 사람들에게 흠을 말하지 말고 팔 것을 요구했다. 흠을 찾아 바꾸어 달라고 하면 바꾸어 주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약신은 장인과 사업을 하면서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한편 이약신은 이 무렵 마산에 파송된 트루딩거(Martin Trudinger 추마천) 목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어학교사 일도 하면서 영어를 배웠고, 호킹(Daisy Hocking 허대시) 양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이약신은 선교사들을 돕고 싶었고, 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더 향상시켜 선교사들의 통역인으로 봉사하면 선교 사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목회보다는 교사로 일하면서 교회 일을 할 생각이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참석과 호킹 선교사의 도움으로 확신

19205월 마산 문창교회(한석진 목사 시무)에서 김익두 목사 부흥회가 열렸다. 주기철도 청년들과 함께 참석해서 은혜를 받고 웅천읍 북부리교회 권찰직을 맡아 교회를 섬기면서 1922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이약신은 친구 주기철의 신학교 입학을 보면서, 자신도 신앙을 새롭게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마산서 가까운 용원에서 부흥회가 있다는 소식에 참석한 첫날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특송을 부르자, 참석한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집회를 마치고 김익두목사가 부흥사 사역에 찬송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니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이약신은 김익두 목사의 이 제안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더 기도하며 묵상하게 된다.

이때(1921년) 호킹 양을 만나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서 이약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과 이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신학교 입학 결심과 양산에서 전도사로 목회 시작

이약신은 19231월 마산 문창교회 안수집사(25)가 되었고, 1년 후 19241월에는 장로 장립(26)을 받고 부인은 서리집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부인은 부친의 영향으로 현실적인 주부였는데, 평생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빠짐없이 쓸 정도로 경제적 계산이 빠르고 정확한 분이었다. 이약신은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 그런 아내가 약간은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나는 늘 당신이 목회자가 될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느끼고 있었어요.”라며 남편의 결심을 순순히 지지했다. 그러나 문제는 장인이다! 이약신은 자신의 결심을 말하는 것이 겁이 났다. 그러나 신학교 진학 결심을 말하자 장인도 아내와 동일하게 말해서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평소 이약신의 말과 행동을 보아 온 아내와 장인은 그의 신학교 진학을 적극 지지하며 후원하겠다고 나섰다.

이약신이 신학교 진학을 결심하고 가족의 지원을 받아 준비하고 있을 때인 1924년 11월 딸 이효재(李效再, 1924년 11월 14일 ~ 2020년 10월 4일)가 태어났다.

이약신이 신학교로 진학하는 과정에 친구 주기철이 도와주었다. 평양신학교에 진학한 주기철은 1922~19253년 간, 양산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고 설교했다. 주기철이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초량교회로 이거하면서, 양산교회 전도사 직을 이약신에게 부탁했다. 이약신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시는 것으로 확신하고, 1925년부터 가족과 함께 양산으로 이사하여 전도사(27)로 섬겼다. 이약신은 1926년 봄 평양신학교에 입학(28)했다. 17세에 평안북도 정주를 떠나 경남을 제2고향으로 삼은 이약신은 12년 만에 평안도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평양신학교 시절

이약신은 1920년대 말 평양신학교의 대부흥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어드만 박사와 함께 부흥 운동의 주역이 되는데, 두 사람은 부흥을 위해서 몇 주일 동안 작정하고 아침마다 함께 기도했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동참하기를 권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차례로 모여서 기도하게 되었고, 따로 모이는 기도 그룹들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어드만 박사가 아침 기도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성령이 능력이 임하는 것을 느꼈고, 이어서 건물 안에서 기도하던 모든 학생들이 울부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강의는 중단되고 기도회는 점심시간까지 이어졌다. 바라던 부흥의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시내에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 학기 시험은 생략되었다. 학생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부흥의 불길을 확산했다.

뒷날 신학교 2년 후배인 박윤선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20년대 후반 평양신학교에서는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교수 중에서 어드만(Erdman) 박사를 중심으로 성령을 체험한 부흥운동이 학생들 사이에서 뜨겁게 일어날 때 이약신은 평양신학교 재학시절 영계의 선봉이었으며 교내 부흥에 있어서 학우 중 선봉으로서 장행(壯行)하였다.” (박윤선, “어떻게 살아야 할까?”(이약신목사 설교집, 편자 최성환, 칼빈문화출판사, 1960)의 서문)

진주 옥봉교회(진주교회) 부임과 부흥

1929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약신은 113일 진주교회 공동의회 결정과 43일 임시노회 허락으로 목사 안수(31)를 받고 그 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게 되었다. 커닝햄(Cunningham) 목사가 당회장으로서 여러 교회를 관리하고, 이약신 목사는 동사목사로서 교회를 담임했다.

진주교회에 부임한 이약신 목사, 1929

평양신학교에서 부흥 운동을 주도한 이약신은 옥봉교회 부임 후 주일학교와 청소년부(불량청소년 영어공부, 성경공부반 개설), 남녀 전도회를 활성화시켰다. 권찰회를 조직하여 남녀권찰 12명이 다섯 구역을 나누어 돌보게 하고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구역기도회로 모여 은혜를 받았다. 부임 직후 선교사들이 시작한 성경학원에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저녁성경공부 모임에 2천명 이상이 참석할 때도 있었다. 당시 진주시 인구가 2만 명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집회의 열기는 대단했다. 교회 발전을 위해 남녀 교우 20여 명으로 십일조회가 조직되어 장로, 집사들이 회장, 서기, 회계를 맡아 헌금하고, 남는 돈은 금융조합에 맡겨 관리하였다. 19299월에는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한 주간 했는데, 매일 밤 1천 명 이상이 회집하였고 믿기로 결신한 새 신자가 340명에 달했고, 감사헌금만 30550전이 나왔다.

진주교회사(1905~1930)의 저자는 이약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강장한 열심가요 기도적 생활을 힘쓰고 부흥적 위대한 능력이 또한 많았더라. 나이는 비록 청년이로되, 매사를 주선하고 진퇴함은 백전백승한 노장 같더라...죄를 침에 산악이 무너지는듯한 음성은 비수로 찌른 듯 통정한 느낌을 주고, 절실한 권면은 감화하는 능이 있도다. 위로하는 부드러운 말에는 위안함이 있고, 무마하는 뜨뜻한 손에는 사랑함이 있더라. 마른 땅같은 심령에게 생명강물을 대어 주었으며, 마른 해골같은 영들에게 활기와 윤택함을 입혔도다....피곤한 자가 상쾌한 정신을 얻고 약한 자는 강한 힘을 얻었도다.... 이런고로 우리교회를 복 있다고 하더라.

이약신의 옥봉교회 목회는 그리 오래가지를 못했다. 부산 초량교회의 간절한 초빙과 친구 주기철 목사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부산초량교회 부임(1931년)과 부흥

이약신 목사는 부산 초량교회에서 1931년부터 1939년 신사참배 문제로 사임할 때까지 600명 회중의 교회에서 목회했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주기철목사가 양산교회를 사임하고 19261월 부산 초량교회로 부임하여 만 6년간 시무하고 마산 문창교회로 전임해 가면서 절친 이약신 목사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고, 부산 초량교회는 공동의회를 한 결과 전체 148명의 유효투표 중 찬성 145, 반대 3명으로 거의 만장일치로 청빙이 가결되어 19318월달에 초량교회 제 4대 목사로 취임했다. 주기철 목사는 이약신과 친구 사이로 초량교회에 몇 번 설교자로 초청을 했고 교인들도 익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압도적인 찬성으로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주기철 목사의 목회로 어느 정도 안정된 교회에 부임한 이약신은 교회 부흥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어려움과 고통을 함께 하는 구제와 사회봉사에도 최선을 다했다. 당시에 큰 화재가 났을 때 재해를 입은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헌금과 의복 등 구호물품을 준비하여 구제하였고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절기헌금으로는 극빈자 구호는 물론이고 개척교회 건축헌금과 어려운 목회자 구제, 호주 선교사 맥켄지 목사가 설립한 나병원을 돕는 일과 장로회 신학교를 돕는 헌금으로 아낌없이 사용하였다. 초량교회 100년사 집필자는 이약신의 목회시대를 초량교회에 최대의 부흥과 발전을 가져다주었다고 평가를 했을 정도로 활기차고 역동적인 목회활동을 하였다.   

호주 장로교 100주년 기념대회의 초청과 방문

1889년 호주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온 이후 부산, 마산, 진주, 거창, 통영 등에 호주장로교회 선교지부들이 설치되었다. 당시 빅토리아주 장로교의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목사부부들과 독신여성들을 대거 한국으로 파송하였는데, 1891년 독신여성 3명을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해방 전까지 35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때 설립한 학교가 부산 일신여학교, 진주 시원여학교, 마산 의신여학교, 통영진명여학교 외에 배돈병원, 부산 나병원 등 많은 학교와 병원들을 설립 경남지역 선교를 주도했다. 1920-30년대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한국과 뉴헤브라이드스 두 곳에 해외 선교를 하고 있었고, 선교비의 2/3 이상을 한국을 위해서 사용했다.

멜버른에서 부산으로, 호주장로교회 해외선교지와 국내 선교지 지도, 1937 ⓒ옥성득

그들은 1937년 빅토리아장로교회 10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면서 한국 선교지에서 한 명의 목회자를 초빙했는데, 그가 바로 이약신 목사였다. 곧 호주장로회가 한국에서 양육한 최고의 지도자가 이약신이었다. 진주의 호킹(Daisy Hooking 허대시) 여선교사는 이약신 목사가 호주를 방문해 주도록 최초로 초청을 받은 것은 그가 진주에서 목회하던 때였다. 이에 호주 방문을 위해 언어와 다른 준비들을 다 했지만 호주 경제 여건이 좋지 않아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7년 후 다시 호주장로회 100주년 행사에 초빙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에 일제치하에서 여권발급이 매우 까다로웠지만, 부산의 맥켄지 목사의 주선으로 성사시켰다.”고 말했다. 맥켄지 목사는 1910년 부산에 선교사로 와서 나환자를 위한 수용소와 병원을 설립해서 운영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총독부에서 표창과 작위를 받아 일본인 고관들과 친분도 있었고, 무엇보다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것이 아닌 국가의례로 받아들여 찬성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여권 발급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곧 호주 선교회 안에서 소수의 의료 선교사외 교육 선교사는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입장이었다.)

1937년 이약신 목사는 경남과 부산 교계를 대표해서 호주를 방문하게 되었다. 57일 부산 부두에서 많은 환송객과 헤어진 후 일본-홍콩-싱가폴을 거치는 여객선 “Taiping” 호를 타고 3개월만인 88일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 항구에 도착했다. 이때 세브란스병원 호주 선교사 맥라렌 의사의 주선으로 멜버른에 간호학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는 손옥순(1936년 세브란스 간호학교 졸), 이영복(1937년 세브란스 간호학교 졸) 두 학생이 동행했는데, 이들은 100주년 기념대회 등 이약신과 함께 호주 교회를 둘러보았다.

193787일 멜버른에 도착한 이약신은 긴 항해로 지친 심신을 9월 말까지 전 한국 선교사 왓슨(R. D. Watson) 목사 집에서 쉬었다. 이어서 체류 기간 동안 매튜(Matthew) 목사(100주년 기념대회의 사무총장)가 호스트 역할을 하며 숙식을 제공하였다. 119일 추수감사절에 개최되는 호주장로교 100주년 기념대회까지 남은 기간 동안 마산과 부산 등지에서 친분을 쌓아온 호주 선교사들 가정과 지역교회들, 여선교회 모임, 등 다양한 행사에 초대되어 호주교회의 한국선교에 대한 열매들을 보고하며 감사를 표했다.

호주장로교회 100주년 기념 집행위원회 회의(1937). 이약신 목사는 한국 대표로 초청받아 6개월간 호주를 방문했다.   ⓒ이은화 교수

드디어 1937119일 벨버른시 타운홀에서 개최된 빌토리아 장로교회의 백주년 기념대회가 시작되었다. 호주는 영국본토인들, 특히 스코틀랜드인들이 대거 이주해 와서 형성된 공화국이었다. 이들은 멜버른을 중심한 빅토리아주 지역에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모교회로 삼고 이를 계승한 입장에 있었기에 100주년 행사에도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지도자들을 대거 초청하였고 웨일즈 장로교회에서도 참석했다. 초청인사들 중에서는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이약신 목사가 참석했다. 3시간여 동안 진행된 예배와 참석 내빈 소개와 인사가 진행되는 중에 이 목사가 맨 마지막 순서자로 소개되었다. 흰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동양에서 온 이방인이 강단으로 걸어 나오자 초청한 직원과 온 청중은 과연 이 동양인이 너무 긴장해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사람들을 긴장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자 청중들은 압도되었고 처음부터 유머와 함께 여유 있게 대회 분위기를 사로잡아 가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약신과 매튜 목사

이약신 목사는 30여 년 전 시작한 호주교회의 한국 선교로 한국교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보고와 호주 선교의 놀라운 성과들에 대해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연설 말미에 이 목사가 지금껏 보내준 호주 교회의 후원을 감사하며, 멀리 한국을 위해 더 많은 후원과 사랑을 호소했다. 그의 연설 전문이 이약신 사진과 함께 교계 잡지 Messenger (Oct, 1937): p. 265에 실렸다. 

이약신은 선교의 동기는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선교의 결과는 민중의 기쁜 삶과 선교를 해 준 교회에 대한 감사라고 정리했다. 호주 교인들은 한국에서 온 이 사명에 불타는 그리스도의 종을 보고 선교 후원과 초청의 보람을 느꼈다. 한국에서 그와 같이 일하며 친분관계를 쌓았던 선교사들도 그의 감동적인 연설에 감격과 감사가 넘쳤다. 후킹 선교사는 이약신 목사의 호주 방문은 감사의 인사 이상의 많은 것을 호주 교회에 가져다 주었다. 이 목사는 향기와도 같이 우리에게로 와서 빛을 발하고 갔다.”는 후기를 남겼다. (Daisy Hooking, “이약신 목사 회상에서)

이약신 목사는 119일 백주년 기념대회 행사 이후에도 이곳저곳에 많은 초청을 받아 설교와 강의, 그리고 각종 복지시설들을 돌아보았다. 특히 미혼모중심의 시설과 교회, 아기들의 집 방문, 킬로만 어린이집 방문, 14명의 정 직원과 100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500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사우스 리치먼드 유치원 방문, 병든 아이들을 모금한 후원금으로 치료해 주는 성 앤드류 병원 등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고국에 돌아와 펼치게 될 복지와 병원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100주년기념대회 참석과 많은 교회와 단체에서 행한 설교와 강연이 당시 호주 기독교계 지도자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그들이 이약신에게 보내준 130여 편의 감사 편지와 사진들이 지금도 생생히 증언해 주고 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듬해인 1938년 봄에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참고 자료와 출처

--검은 부분은 고명길 탁월한 복지목회자 이약신,” <코람데오>, 2019614일자에서 요약한 것임.

--보라색 부분은 필자가 “The Story of the Rev. Yaksin Lee,” Messenger (July 30, 1937): 67; “Message from the Rev. Yaksin Lee,” Messenger (Oct. 15, 1937): 265, Missionary Chronicle에 실린 기사들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사진도 필자가 잡지에서 가져와서 넣었다. 두 장은 이약신 목사의 5녀 이은화 교수의 글에서 가져왔다. (잡지를 복사해 준 정병준 교수에게 다시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