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택부, "언더우드 박사," <청년> (1978년 4월): 10.
언더우드 박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만큼 그는 너무나 유명한 선교사이다. 그는 첫째로 한국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창설자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YMCA 창설의 최초의 발의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887년 새문안교회를 창설하고 보니 그는 전도자로서의 대업을 성취한 느낌이었다. 허나 한구석 허전한 것은 아직도 이 나라 문화계에는 파고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다. 모여드는 교인들이란 전부가 무식대중이었고 지식인은 하나도 없었다. 무식한 교인들이 먼저 교회당을 점령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비록 유식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어도 교회에 나올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관념으로써는 무식대중과 유식한 사람들은 같이 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민과 양반, 상민과 선비의 구별은 철저해서, 아무리 예수를 믿고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더라도 같이 앉아 예배를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언더우드 목사가 YMCA의 창설을 발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한국의 유식층, 양반계급, 똑똑한 청년, 문화계에 접근하려면 교회 아닌 다른 기독교 기관을 만드는 일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심을 하고 YMCA 국제위원회에 청원서를 내게 됐다. 한국에다 YMCA 회관을 지을 수 있는 건축기금을 원조해달라고!
이 청원서는 1899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와의 공동명의로 발송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첨부된 문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곧 150명의 한국 청년들의 진정서였다. 이 진정서를 첨부한 까닭은 한국 청년들의 요구를 반영시킴으로써 그 청원서의 효력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의 사정을 언더우드 목사 자신의 기록을 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뉴욕YMCA 본부에다 청원서를 발송하기 전에, 어느 주일날 오후 몇몇 청년들을 나의 집으로 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때 나는 5명 또 6명 정도의 청년들만이 모이더라도 큰 성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그네들이 너무 많이 온다고 해서 그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많은 청년들을 수용할만한 응접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결국 150명의 청년들이 진정서에 도장을 찍고 YMCA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때 도장을 찍은 사람중의 한사람이 현 한성시 판윤(漢城市 判尹)입니다.」
여기 한성시 판윤 즉 오늘의 서울시장이란 사람은 민경식(閔景植)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며, 1901년 드디어 한국Y의 초대간사 질레트(P. L. Gillett)씨가 파송되어 와서 창설작업을 하고 있을 때의 중요한 기록을 또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중국에 와 있는 뿌락만(F. S. Brockman)씨가 언더우드 목사에게서 들은 말이다.
「상류계급 출신의 청년들에게 접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느냐하는 사실은 언더우드 박사가 내게 직접 말한 것으로써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귀족 출신의 양반이 기독교에 접근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양반은 말하기를 “내가 기독교를 알고 싶은데, 차마 교회당에 나갈 수는 없고 하여 선교사들 중의 누군가가 내게 와서 잘 설명해 줄 수는 없느냐”라고 요구해왔던 것입니다. 드디어 그 양반은 평민을 가장하고 뒷문으로 살짝 교회당에 들어와 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바로 옆줄에 자기 하인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질겁을 했습니다. 만약 그가 작 하인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큰 망신을 당하고, 그의 위신은 아주 땅에 떨어지고 말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언더우드 박사는 이 사건을 실례로 삼아 그 당시 교회가 상류계급에게 접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느냐 하는 것을 나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YMCA는 그 당시 소외됐던 상류계급, 지식계급 청소년들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이것이 한국Y의 특징이다.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되었을 때 언더우드 목사는 12명 이사중의 한사람이 됐고 1910년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가 조직되었을 때 초대회장이 됐다. 아깝게도 그는 1916년에 세상을 떠남으로 더 이상 Y활동을 할 수가 없었으나 그의 아들 원한경(元漢慶) 박사가 그 뒤를 이어 오랫동안 이사가 되었다. 이처럼 3대가 한국YMCA에 봉사했다. 고 언더우드(元杜尤) 박사는 1859년 7월 19일 런던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갔으며, 뉴욕대학과 개혁파 신학교를 거쳐 1885년 4월 5일 한국선교사로 왔었다. --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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