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엔 왕이 없고, 제사엔 조상이 없고, 예배엔 하나님이 없다]
유교식 섬김(공경, 절, 제사)의 의례가 기독교 예배에 들어왔는가?
아니면 무교식 영 섬김(초혼, 신 모시기, 신 들림, 신 보냄)이 한국 교회 예배를 지배하는가?
1. 의궤에는 왕이 "없다."
예의 왕국 조선은 왕실의 행사를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이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인 의궤(儀軌)들은 그 역사적 사실성과 규모와 채색과 구도 등에서 귀중한 국보적 사료이고 세계적인 유산이다. 다만 의궤는 국왕의 어람용이거나 왕실 행사를 위한 자료집이어서, 극소수의 사람만 볼 수 있었던 특별 자료였다. 그것이 이제 박물관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책으로 출판되어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의궤엔 언제나 왕의 자리가 비어 있다. 1887년 (고종 24년) 신정왕후 팔순 잔치에서 보듯이, 궁녀가 둘러싼 왕의 의자에는 고종이 그려져 있지 않다. 왜 빈(空) 공간(空間)으로 남겨놓았을까?
참고로 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그려서 종묘에 모셨다. 어진을 그릴 때는 불화(佛畵)를 그릴 때 발전시킨 배채법(背彩法)을 사용했다. (참고: http://tip.daum.net/question/3314963) 고려 불화를 그리던 정성과 불심이 조선 시대 어진을 그릴 때 왕에 대한 충성심과 외경심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왜 의궤에는 왕을 그리지 않는 게 관례요 원칙이었을까? 아직까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한국미술사 전공 교수에게 물어도 분명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림의 왕이 임금 자체와 동일시되던 때이므로, 어진과 달리 여러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의궤에서는 혹시 왕을 그리다가 화공이 실수로 훼손하거나, 규장각 사서의 실수로 보관 중에 훼손하거나, 혹은 홍수나 전쟁으로 인해 파손되거나, 혹은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훼손할 경우를 대비하여 의도적으로 왕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의 경우는 그 가능성이 적었는데, 역모자들이 규장각이나 외규장각에 보관된 왕실 자료를 훼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그 자리에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존재한다는 논리는 왕의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전통과도 연결되는 듯하다.
아무튼 주로 왕의 행사를 그린 그림에 주인공인 왕이 없다는 역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침묵이 웅변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부재(없음)의 공간이 때로 존재(있음)의 공간보다 더 강력한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역설이다.
2. 제사에는 조상신이 "없다."
이런 역설이 유교 제사에도 적용된다. 제사에서 조상신은 신주(위패)에 거한다. 후손은 조상의 신이 그 신주에 거한다고 믿고, 제사 때마다 위패를 꺼내어 조상신을 부르고, "마치 조상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제사한다 (祭神 如神在). 곧 마치 그 모습을 보듯이(如見其形), 마치 그 목소리를 듣듯이(如聞其聲), 마치 음식을 먹으시듯이, 가족사를 보고하고, 음식을 올리고, 흠향하신 후, 절을 한 후 다시 위패함으로 돌려 보낸다.
임금을 그린 의궤에 임금이 없고, 조상에게 제사하는 제례에 조상이 없다. 하지만 이 "없다"는 "있다"보다 더 강력한 존재적 지위를 가진다. 여기에 조상신과 후손이 제사를 통해 강력하게 만나는 역설이 있다.
그러나 제례에서 정성이 사라지고 효심이 사라지면 그 "없다"는 그저 무존재적인 "없다"로 전락한다. 오늘날 제사가 사라지고, 노인이 버려지고, 노인 자살이 세계 1위가 되어 버린 한국 상황은 바로 전근대적 "없다"에 있던 "있다"의 역설적 논리가 사라지고, 있다가 있다이고 없다가 없다라는 단순직설적인 근대적 논리, 물질적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물성(物性)이 영성(靈性)을 삼켜버리자, 무슨 제물을 사서 제사상에 올릴까, 그 위치는 무엇일까에 매달리게 되고, 그러다 의례 자체도 없어지고 만다.
3. 기독교 예배엔 하나님이 "없다"
초기 한국 교인들이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에 참석했을 때 그 예배하는 영성은 1) 조선시대 왕을 섬기는 충의 의례와 유교의 효의 의례인 제사의 영성과 연결되어 있었거나, 2) 무교의 굿판에서 보는, 신을 부르고 신을 모시고 신을 즐겁게 하고 신나게 놀고 신이 나가고 신을 평안한 곳으로 보내어 드리는 신 경험과 연결되어 있었다.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예배는 유교 제례와 무교 굿과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초기 한국교회는 유교적 제례가 지닌 조상'신'의 무존재의 존재 경험으로 조상의 조상, 천부(天父)이신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러다가 1907년 대부흥 운동을 계기로 성'신'을 경험하면서 무교의 굿 영성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유교의 없는 듯이 계신 조용한 신보다, 무교의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시끄러운 신이 더 피부에 와 닿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주일 낮 예배에는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계신 조용한 신을 섬기고, 밤이나 새벽이나 산에서는 뜨겁고 화끈한 신을 섬기는 것이 한국 개신교의 현실이었다. 평온할 때는 전자의 없는 신, 위기의 때는 후자의 있는 신을 섬겼다. 남자들은 대개 전자의 신, 여자들은 후자의 신을 섬겼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전자를, 보수적인 평신도는 후자를 섬겼다.
한국교회의 영성이 지닌 이 음양, 이중성(duality)은 유교적 교회 구조(가부장적 당회, 남자 목회자의 권위)와 무교적 영성(삼박자 축복, 기복 신앙)과도 연결된다. 대형교회는 이 이중구조를 잘 이용한 사례다.
한국 개신교 예배에는 유교식 제사에서 없어진 조상신 자리에 제주인 담임 목사가 자리 잡고, 그가 무당처럼 신을 부리고 신을 존재케 한다고 하면 과언일까?
영으로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없다와 있다의 역설적 관계가 잠시 예수의 성육신으로 해소되었다가, 다시 성령강림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섰다. 1년 몇 차례 제사를 통해 대면하는 유교의 조상신이 아니라, 위기 때에는 찾아 부르는 무교의 신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신은 무엇이 다른가?
천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로 현존하시고, 일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성령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시하기에 오늘도 우리는 신앙의 순례의 길을 간다. 비록 그 하나님이 때로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우슈비츠의 상황이 오더라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월호의 상황이 있어도, 그 신 부재의 고통 속에서 신 존재의 역설을 찾아가며 그 긴장을 놓치지 않는 인간이 되기를 모색한다.
(2016. 5. 22. 옥성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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