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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교육, 학교

1914 이화 대학부 1회 졸업생

[이 한 장의 사진] 

이화학당 대학부 제1회 졸업생 3명, 1914년 4월

왼쪽에서부터 이화숙, 신마실라, 김애식

김애식은 영화여자소학교(당시 이화학당 부속 소학교)를 수료하고 이화학당으로 진학

1910년에 이화학당에 대학과 섪치, 1914년 4월에 1회 졸업.

옥성득 옥성득

신마실라는 다음을 보라: 


대학과 1회 졸업생 신마실라 선생, 광복 70주년 독립유공자로서 대통령 표창 추서 받아

http://www.ewha.ac.kr/ewha/ewhaNews/view.jsp?id=ewhakr_070100000000&newsSeq=121327&fbclid=IwAR2k90j8cvXbbmpUzQ9AhUgAdafEKYONQ1zdpmniN5cgnbGmBUf0LQYKRMc

8.15 광복 70주년을 맞아 이화학당 대학과 1회 졸업생인 신마실라(신마숙) 선생이 독립유공자로서 대통령 표창을 추서됐다. 신마실라 선생의 아버지 신재희 선생도 1895년 을미의병장 활동으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바 있어 부녀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경우이다.

신마실라 선생은 이화숙·김애식 선생과 함께 이화학당 대학과 1회 졸업생이자 한국 최초의 여자 대학 졸업생이다. 이들은 졸업 축하 예배에서 각각 ‘교육 요소로서의 놀이’, ‘한국미술탐구’, ‘미국 시인 롱펠로우’라는 주제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영어와 우리말로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해, 당시 이화의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 학부의 엘리트가 된 그들은 자긍심만큼이나 책임감도 절감하고 있어, 여성 지도자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각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활동과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신마실라 선생은 1919년 2월 3·1 운동 전 황에스터 선생과 이화학당 비밀조직을 만들었고, 파리강화회의의 여성대표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행이 자금 부족으로 무산되었고, 신마실라 선생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1919년 미국으로 향한다.

photo도미 후 신마실라 선생은 이승만 당시 국무경을 만나 “구제회를 만들어 독립자금에 쓰일 의연금을 모으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는 워싱턴 및 펜실베이니아에 거주하며 1925년 구미 외교위원회가 폐쇄될 때까지 김규식·박영섭·서재필 선생과 함께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연설 모금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1920년대 초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 입학하여 교육학 학사를 취득하기도 했다. 

이화의 교육으로 상당한 영어실력과 세련된 교양을 지녔던 신마실라 선생은 여러 곳에서 귀빈으로 연설을 하며 의연금을 모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에 그는 구제회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계를 느끼고, 본인 스스로 사업을 크게 벌여 모국에 지속적으로 독립자금을 보냈다. 신마실라 선생은 1956년 완공된 본교 대강당을 짓는 데에도 많은 돈을 기부했다고 전해진다. 

미국에 거주하면서도 삼일절 행사에 꾸준히 참석했던 신마실라 선생은 1942년 자동차 손괴사건으로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필라델피아 지역신문 ‘The Philadelphia Inquirer’의 당시 기사에 따르면, 신마실라 선생은 상대방 변호사가 “일본인에게는 법정이 닫혀있다”는 언사에 극심하게 반발하여 ‘Me a Jab? Not for Million, Declares Korean Women Here’이라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식민지 상황과 남녀 차별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이웃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구국운동과 여성 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신마실라 선생은 후대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신마실라 선생의 자손은 추서받은 훈장과 훈장증을 본교 이화역사관에 기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