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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교육, 학교

1930 마산 의신여학교

마산의 첫 근대학교는 1908년에 세워진 창신학교이다. 일제 시대에 의신여학교로 운영되다가, 해방 이후 다시 창신학교로, 창신고등학교로 발전했다. 의신여학교 발전에는 호주선교부의 맥피(Ida McPhee, 1881-1937) 양이 크게 기여했다. 

1. 민족대백과사전을 보자

1906년(광무 10) 5월 17일에 기독교 장로인 이승규가 현 마산 문창교회 자리에서 독서숙(讀書塾)을 설치하였고, 2년 후인 1908년(융희 2)에서야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마산시 상남동에 사립 창신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경남 일대에 호주(濠洲)에서 온 선교사들은 창신학교를 육성하는 데에 물심양면으로 협조하여 고등과를 병설하였다. 이것이 창신중학교와 창신고등학교가 설립하게 된 기반이 되었다.

교육목적은 교육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을 배양하고, 민족의식의 고취를 함양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교과서는 애국심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교정에 태극기를 달았으며 모든 모임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1912년에 고등과를 설치하였고, 1913년 4월에 남녀공학을 포기하고 창신의 여학생 26명으로 ‘의신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15년 3월 22일에는 고등과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인근 지역의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이로써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1919년에 마산에서 발생한 ‘기미만세의거(己未萬歲義擧)’에서 그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선교사들은 1924년 마산시 회원동(현 창신중·고등학교 자리)에 본격적으로 신축교사를 마련하여 정규 중등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 탄압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창신중학교는 1931년에, 창신초등학교는 1939년에 폐교 되었다.

1948년 5월 재단법인 경남노회 기독교 교육학원이 설립되어 중학교 인가를 받기까지 창신학교는 정규학교로서는 중단상태에 빠져있게 되었으나, 그 시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 산하에서 이용되었다. 1948년 창신학교가 재건된 이후 초등과는 재건하지 않고, 정부의 학제에 따라 중·고등학교 만을 재건 운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 교육의 실시로 일제로부터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한 바 있는 시대적 상황만큼이나 수많은 질곡을 겪은 학교였다. 마산지역의 민족학교로서 지역민의 후원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창신고등학교의 모태가 된 학교이다.

2. 1930년 호주장로회 선교잡지 The Missionary Chronicle에 실린 1929년 제14회 졸업식 사진

 3. <크리스찬 경남>, 2011년 8월 11일자 맥피 양에 대한 기사 

마산지역 중심 26년간 여성교육 힘 쓴 어머니, 맥피:  30세 한국과 독신으로 살며 '헌신 열매'맺어  

디컨네스훈련소 출신

아이다 맥피(McPhee, Ida, 한국명: 미희)는 1881년 호주 빅토리아 주 탈봇(Talbot) 근처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던 두갈드 맥피(Dugald Mcphee)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그녀 역시 교사가 되었고 빅토리아 주 7개의 학교에서 경험을 쌓았다. 키네톤(Kyneton) 교회에서 장로교청년연합회 (Presbyterian Fellowship association) 에 가입한 그녀는 이 운동과 주일학교에 열정적인 일꾼이 되었으며 1910년에는  선교의 뜻을 품고 디컨네스훈련소에서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맥피는 교육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911년 10월 30일, 찰스 메클라렌 부부와 함께 같은 배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부산(부산 범일동)에서 1년간을 머물렀는데 엥겔(Rev. G. Engel, 왕길지) 목사, 메켄지(Rev. James Noble Mackenzie, 매견시) 목사를 비롯하여 니븐(A. Niven), 무어(E. Moore), 켈리(Kelly) 등의 여성선교사와 함께 거주하면서 한국말을 배웠고,  주일에는 부산진교회에 출석하며 오르간 반주를 했다. 또한 마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아미 왓슨(Mrs. Amy Watson)이 아플 때는 간호차 마산에 머물기도 했으며 1912년 6월 한 달 동안에는 평양에 새로 설립된 한국어 학교에 참석하기도 했다.

마산 의신여학교 교장으로 24년간 봉직

1913년 2월경, 맥피는 마산(상남동 74번지)으로 이주하였다. 그 당시 마산 창신학교에는 남녀 아이들이 공학으로 함께 공부하고 있었고,  마산포교회(문창교회)에는 160명의 어린이들이 출석하고 있었다. 그해 4월 17일, 창신학교에서 여학생만을 분리하여  의신여학교를 새롭게 개교하게 되었고 맥피가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9월에는 학교 기숙사가 완공됨으로 맥피는 사감 활동도 겸임했다.

이에 앞서 마산에서는 아담슨(Rev. Andrew Adamson, 손안로) 선교사를 중심으로 구습을 타파하고 남녀의 평등권이 교육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남녀공학제(男女共學制)의 혁신적인 교육 제도가 도입되었고 이에 1909년 8월 19일 사립 창신학교가 설립 허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운영 과정에서 이를 기피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남녀공학이라고 너무 개방적으로 하자니 학부형들의 반대가 강하였고, 엄격하게 통제하자니 학생들의 반대가 거세었다. 당시 서울에서 초빙된 남승 선생은 학생 지도에 있어 굉장히 엄격한 분이었다. 교실 안에서 남학생이 어쩌다 여학생에게 눈만 한 번 돌려도 벌을 세웠고, 운동장에 나와 놀 때에도 남녀를 분리할 정도로 강경한 봉쇄령을 썼다.그러나 이러한 남승 선생의 초강경 봉쇄령은 마침내 학생 전체 반대 운동의 원인이 되었고 이 때문에 남승 선생은 사임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녀공학제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자 결국 여학교를 독립 경영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1913년 4월 5일, 호주 선교회의 후원 아래 창신학교에서 28명의 여학생을 분리하여 마산지역의 최초 여학교인 의신여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맥피 선교사가 초대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의신여학교는 동래 일신여학교에 이어 호주선교부가 직영하는 부산·경남의 두 번째 여학교가 되었다.  

학교 부지(敷地)는 상남동 노비산 언덕 위 호주선교사 사택 일부와 주위 일대를 사용하였으며 창신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자매학교로 발전했다.

맥피는 그 후 24년간의 선교활동에서 1917년~1921년과 1932년~1932년의 공백 기간을 제외한 대부분을 의신여학교의 교장으로 지냈으며 그녀의 지도력 아래서 학생수가 28명에서 330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그녀의 교사 훈련 능력은 어린 교사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교활동 범위를 학교에 한정시키지 않고 낮에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여성들과 소녀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열었으며 마산포교회의 주일학교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또한 마산시와 그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성경공부반을 개설해 운영하기도 하였다.

맥피는 의신여학교 설립당시부터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여 1937년 4월 순직할 때까지 평생을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마산지방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학교를 경영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이 여학교는 1939년 7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조선총독부의 기독교학교 폐쇄령에 의하여 폐교되었다.

진주·부산을 드나들며 나눔의 삶에 힘쓴 맥피

맥피 선교사는 1916년 부친의 건강이 악화되자 호주에 일시 귀국하였다. 1919년까지 호주에 머물다가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의신여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그녀는 진주와 부산을 드나드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나눔의 삶과 교육선교 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녀는 1932년~1933년 데이비스 교장(Miss Margaret S. Davies, 대마가례)이 휴가를 떠나 있는 동안, 동래일신여학교(Jane B, Harper Memorial Girls' School)에서 대리교장으로 일했다.

1933년에는 마산에서 2개의 유치원(의신, 월영) 운영에도 참여했다. 1925년 9월에 내한한 엘리스(Miss Clare Ellis, 이명선) 선교사가  1927년부터 마산에서 운영한 유치원도 엘리스가 사임하고 귀국한 이후로 이를 인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1936년, 맥피는 진주에서 시원여학교와 유치원 운영의 행정 지원 업무도 수행하였다. 진주에는 클러크(Miss Frances Louisa Clerke. 가불란서) 선교사가 1910년 3월 내한하여 배돈병원 초대 간호부장과 시원여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는데  1936년, 그가 신병을 얻어 은퇴하고 귀국하게 됨으로 그 후속 조치로 행정 업무를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성가대와 주일학교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마산지역 기독교면려회 운동에 최선을 다했다. 평일에는 틈을 내어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 반도 운영하였다.

독신으로 살며 여성교육과 선교에 헌신

맥피 선교사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 땅에 와서 26년간을 일을 하다가 그 뜻을 다 피워보지도 못했을 56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독신 여성으로 내한하여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한국의 여성 교육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그리고 폭 넓게 활동한 고마운 선교사였다. 그녀는 마산을 중심한 경상남도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1937년 3월 초 그녀는 심장천식에 걸려 테일러 의사 부부의 간호를 받았으나, 4월 13일, 진주에서 순직하였다. 원래 그녀의 무덤은 진주의 호주선교사묘역에 있었으나 1966년 마산의 무학산(마산시 회원2동 산 63-3번지)으로 이장되었다. 그녀의 묘비에는 생졸연대(1881-1937)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라는 성경 귀절이 쓰여 있다. 

맥피는 학교를 거쳐 간 많은 학생들로부터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또한 마신포교회 안에서는 헌신적이고 열심있는 성도요, 힘 있는 전도자, 많은 사람의 친구, 또 어떤 이에게는 ‘어머니’였다.

호주장로교 선교위원회가 남긴 메모의 일부를 소개한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감동이었다. 그녀의 친절한 성격은 그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의 기분을 복돋아 주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대한 평가는 그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최대의 은사인 넓은 마음씨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그녀에게 오도록 했고, 그녀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는 관대하게 자신을 내주었다.”

순직호주선교사묘원 조성의 계기가 된 맥피 선교사 묘지 이장 통보

2009년 10월 2일, 창원시 진동면에 소재한 창원공원묘원에서는 호주장로교 경남선교120주년을 맞아 순직호주선교사묘원 조성식이 있었다. 이 묘원 준공은 지난해 초 마산 무학산의 맥피 선교사 묘소가 강제 이장 당할 처지에 이르게 되자, 경남지역에서  순직한 조셉 헨리 데이비스 외 7명의 선교사의 묘지나 묘비를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창신대학교 강병도 총장의 발의로 시작된 이 일에 경남성시화운동본부(구동태 감독)가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경남 선교 120주년을 맞아 흩어진 8명의 선교사를 한 자리에 모시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 묘원의 터는 창원공원묘원 신성용 이사장(가포교회 장립집사)이 쾌척했다. 공원묘원 중심부에 위치한 3300㎡(1000평) 규모로 준공된 선교사묘원은 300평의 묘역과 주변 공원부지 700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비는 앞면에 한글, 뒷면에 영문으로 만들어졌으며 최고의 원석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디자인으로 제작했다. 또 경남 출신의 순교자인 주기철 손양원 목사 기념비도 함께 세워졌고, 지난 해에는 순교자인 최상림 목사와 이현속 전도사의 기념비가 추가됨으로 경남 지역 신앙의 뿌리 찾기가 용이해졌다.

이 기념묘원의 이름을 ‘순직’ 호주선교묘원이라 표현한 것은 호주 선교사들의 별세가 과로와 풍토병 등으로 인한 죽음이기에 박해에 의한 ‘순교’와는 다르다는 판단에서였다. 8명 선교사 중 5명은 부산에 묘가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유실됐고, 3명의 묘는 경남 산청군 덕산교회에 2기, 마산공동묘지에 1기가 남아 있었는데 2009년에 함께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2011.8.11. 크리스천경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