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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목사, 신학교

1971 목사 계층 분화: 도시 중산층 목사, 농촌 목사, 도시 빈민 목사

1971년 목사라는 직업, 두 가지 유형으로 분리되다

도시의 중형 교회 중산층 목사 vs 시골의 작은 교회 가난한 목사

모이는 도시 교회의 군림하는 목사 vs 이농으로 흩어지는 시골의 섬기는 목사

도시에서는 사모의 치맛바람 vs 시골에서는 사모의 몸뻬 봉사

도시 월 평균 20,000원 월급 vs 시골 교인 50명이 되어도 월급 4,000원

 

해방 이전 초기 목사와 시대에 부응한 목사들 

이들은 양 떼의 목자요 종으로 전도인들이었다. 지식이 뛰어나지 않았으나 투철한 사명감과 뜨거운 전도열이 있었기에 한 지역 교회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자요 문명의 선구자로서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다. 길선주 목사를 필두로 시대에 부응하는 목사는 불가피하게 이용도를 낳아 명맥을 이어갔고 해방 후 분단 상황에서 손양원을 낳았다. 그리고 노동자 근로 인권을 위한 전태일의 희생까지 이어졌다.  

부흥회의 변질

초기 부흥회와 사경회는 민족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영적 부흥에 촛점을 두었으나, 일제 시대 핍박기를 지나면서 내면적인 경건화로 흘렀고, 해방 이후에는 모이는 교회만 강조하여 교회 확대와 성장만 추구하는 부흥회가 되었다. 부흥사들은 노인과 부녀층 앞에서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사회를 定罪하고 末世를 예언하며 入神을 강조하여 타계주의로 흘렀다. 모 기도원의 한 목사는 오는 신자마다 빈 주머니로 하산하게 했다. 어떤 목사는 콜레라도 기도로 고칠 수 있다고 이상하게 변했다. 이런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불안한 사회 때문이기도 했으나, 기성 교회의 무기력 때문이기도 했다. 교회의 사유화어떤 목회자는 교인들을 어린 양으로 취급하고 군림했다. 그 결과 그 교회는 아무개 목사의 교회로 불렸다. 목사가 교회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고, 교회가 목사의 개인적 사유물로 사유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