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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승만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이승만의 행동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이승만의 행동

다음은 위키피디아 이승만 항목에서 3.1운동 관련 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3월 1일 미국 현지에서 3·1 만세 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홍보될 것으로 예상했다.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통보받았다. 1919년 4월 1일 기호 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4월 14일 3·1 만세 운동의 열기가 미국에 번져 한인자유대회가 미국 독립 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 최초의 의회 장소로 발길을 옮겨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사진이 남아 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 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승만은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 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연사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빠진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승만의 첫 활동이다. 

1) 하와이에서 뉴욕으로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고 한국 독립안을 거론할 계획을 발표

2) 3월 11일 이승만은 헨리정과 함께 미국 국무성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그 주요 내용은 삼일운동으로 투옥된 1,000여 명의 한인들이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인도적 차원에서 미국이 일본에 압력을 넣어 이를 중지시켜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삼일운동에 대해 상하이 본부[아직 임정 조직 전이라, 정부라고 밝히지 않고 망명 "본부"라고만 씀]에서 전보를 받았으며, 300만 한국인3,000개 기독 교회가 독립을 선언했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당시 일본 언론은 반미 분위기에 팽배해 있었고, 삼일운동이 미국 선교사의 선동과 후원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이런 반미 여론의 오해를 잠재우고, 또 인도적 차원에서 고문 금지 등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아무튼 1919년 3월 이승만의 첫 외교 활동은 감옥에 갇힌 한국인에 대한 고문 금지 요청이었다.  

2017/08/06 ⓒ옥성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