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05년 8월 4일 이승만 윤병구를 일진회 대변인으로 보도한 Washinton Times 단신이 있다. Washington Post도 아니고, 10매의 긴 글도 아니다. 다른 설명이 없다. (사진 1) 일진회 대표라고만 했지 친일 외교라고 하지 않았다. 일진회= 친일파라는 프레임으로 글을 보아서 한겨레신문 기사가 2011년에 나왔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친일파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이역만리까지 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WT는 종종 오보를 했다.)
(2) 4일자 5일자 뉴욕, 와싱턴, 시카고 등 주요 도시의 신문들은 한인 대표, 개인 자격을 말하고 어떤 정파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8일자 오하이오의 한 카운티 신문이 WT를 따라 일진회를 거론했다. 그것 뿐이었다. 후속 보도가 없다. 18일 청원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왜? 그들이 오보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정 보도도 나가지 않았다. 미국 독자 중에 그것까지 따질 자가 있었을까? 그러면 우리는 어떤 기사를 수용해야 할까? 수십 개 신문 중에서 지방지에 있는 한 기사를 놓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따지면서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3) 수 많은 미국 신문들 중에서 몇 개 작은 신문들이 일진회를 거론했다고 해서 그 말이 언급된 이유나 소스나 전승이 어떤가를 따지는 것은 호사가의 일이다. 무조건 일진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여 놓고 나서, 이제 와서는 그 본문 비평, 전승 비평 등을 하겠다는 것은 별로 생산적인 태도는 아니다. 처음부터 "왜 그 신문은 이승만을 일진회 대변인이라고 했을까"라고 제목을 붙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일진회 친일파로 규정해 놓고 나서, 반론을 제기하니까, 제기한 사람의 짐작한 사실들까지 문제 삼으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일진회 대표로 친일 외교 행동을 했느냐 이다. 다른 신문 8월-10월 치를 일부만 보면 알 수 있는 사안이다. 동시에 일진회의 성격까지 정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일진회의 한 핵심은 동학 세력이었다. 동학도 중에는 부패한 대한제국이나 양반보다 차라리 일본이 잠시 보호국으로 다스리는 게 좋다고 본 자들도 많았다.
(4) 그러면 왜 일진회라는 단어가 나왔을까? 러일전쟁 마무리 지점에 한국에 대한 기사가 폭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친일적인 내용이었다. 부패한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일정 시간 후 근대화 독립 국가가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1919년까지 계속 되었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거의 매일 올라오는 상황에서 일부 기자는 일진회니 진보회니 공립협회 등의 단어를 대충 알고는 있었다. 이승만의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진보적인 활동도 이미 여러 신문에 보도되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얼마든지 진보를 내세운 일진회와 연결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 기자 중에 누가 자세히 일진회 내막을 알 수 있었겠는가?
1905년 7월-8월 현재 일진회의 성격도 문제다. 동시에 당시 한국인 지식인들의 대일관도 따져 보아야 한다. 아직 을사조약 전이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약속을 믿고 러일전쟁 때 일본을 지지하고 적십자병원에 헌금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진회와 상관이 없었다. 1904년 8월 7일 출옥했고, 10월 15일 상동청년학원 교장이 되었으나 11월 말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전덕기 등과 함께 일했다. 따라서 일진회와 무관했다. 더욱이 윤병구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승만을 친일파로 모는 것도 문제지만, 하와이에 있던 윤병구 목사는 왜 함께 친일 일진회 대표로 모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일진회 하와이 지부인가?
(5) 이 사건을 알 수 있도록 다른 중요한 자료들도 제시했다. 그런데도 WT와 오하이오 Stark County Democrat라는 작은 신문이 흥미거리로 다룬 기사에 매달리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당시 한국에 대한 온갖 정보(주로 친일적)가 난무할 때였다. 미국에서는 친일적인 관료, 친일적인 기자, 친일적인 신문 기사들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6) WT에 대해 말해 보자: 내가 몇 년 전에 소개한 글이지만 WT는 1904년 12월 워싱턴 디시에 온 한국인 민족주의자 이승만에 관심이 많았다. 6월 4일자에서는 그가 5년 이상 감옥에 있었던 이야기 등을 반 면에 걸쳐 싣고, 한국인 두 명이 이승만의 아들을 데리고 왔으나 학업 때문에 양육 가정을 찾는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날 기사에서는 반일 민족주의자로 제대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2) 1905년 이승만이 친일적이거나 친일 행동을 한 게 있으면 다른 증거를 내어 놓아야 할 것이다. 미국에 와서 한국 독립 외교 활동을 한 두 사람을 왜 친일파로 모는지 알 수 없다.
(7) 일진회가 이승만을 파송했다는 국내 기록이 있는가? 이승만을 미국으로 보낸 이들은 한규설과 민영환 대신이었다. 고종도 허락했다. 그래서 고종 밀사설이 나왔다. 이승만의 미국행에 대해서 일본이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민영환이 미국 여행비를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8월 9일 민영환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민영환이 보냈기에 이승만은 주미공사관에 가서 김윤정 서리공사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러나 몸 보신적인 김 공사는 공식적인 서류를 원했을 것이고 끝내 이승만에게 공식 루트를 주지 않았다. 한미조약에 따라 미국의 거중 조정을 요구해야 하는 공사가, 이승만 윤병구의 외교 활동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전형적인 관료요 부패한 김 공사가 바로 친일 인사라고 비판할 인물이다. 주미 한국 공사관의 공식적 지지는 김 서리공사 때문에 얻지 못했다. 대신 워싱턴 정부 고관들을 접촉했다. 태프트 편지가 있으니 뉴욕 별장으로 가라고 한 듯하다.
(8) 러일전쟁이 마무리되고 곧 포츠머스회담이 열릴 것이므로, 루즈벨트는 8월 4일 한인 대표로 두 사람을 만나고, 곧 바로 러시아와 일본 외교관들도 만났다. 루즈벨트는 “한미조약”에 따라 한국을 도울 도덕적 의무가 있었기(이 부분은 신문 보도에 나옴)에 그들을 만나주는 제스처는 취했으나, 비공식 대표이므로 공사관을 거쳐 공식 청원서를 올리라고 하며 시간을 연기시켰다. 비공식이므로 포츠머스 회담에 참가하거나 청원서를 제출할 수 없다며 외면한 것이다.
1905년 7월 29일 가츠라 태프트 밀약이 맺어졌다. 그 일로 일본에 가는 태프트는 호놀룰루에서 윤병구를 만나 청원서를 보았으나, 이미 보호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추천서만 써 주고 대통령을 만나라며 책임을 미루고 시간을 연기시켰다. 자신의 일본 미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호의를 보이는 척 하면서 술책을 부린 것이다. 이때 신문들은 태프트의 미션이 보호국 20년이라고 보도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보호국화를 막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그것이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애국을 위해 푼돈들을 모아 윤병구를 워싱턴에 파송한 이유였다.
(9) 이승만은 고종의 밀사도 하와이 대표도 아니었으나, 윤병구와 동행하게 되면서 하와이 대표로 바꾸었다. 민영환 밀사라는 개인 자격보다 윤과 함께 한인 대표로 가는 게 좋았을 것이다. 신문은 모두 이승만이 조지와싱턴대학교 학생이라고 쓰고 있다.
(10) 이들의 활동은 을사늑약 이전 미주 한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외교전이었다. 다른 루트가 없었기에 선교사나 인맥을 총 동원했다. 사실 보호국 이전 다른 외교 노력이 거의 없었다. 하와이 한인들은 윤 목사 여행비를 댔다. 농장에서 일하고 모은 피땀 어린 돈이었다. 태프트가 호놀룰루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윤 목사를 대표로 임명하고 7월 12일 청원서도 만들었으나, 태프트는 대통령에게 가 보라고 책임을 미루고 시간을 벌었다. 결국 추천서를 얻는데 그쳤다. 하와이 한인들은 포츠머스회담에 참가할 한인 대표로 윤목사를 임명했다. 그가 와싱턴에 와서 이승만 이름을 추가한 듯하다.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이 추가 비용을 지원했는데, 이것은 신문 보도에 있다. 공립협회 지지라고 볼 수 있다. 워싱턴 한인들도 지지했다. 뉴욕에서는 조지 히버 존스 선교사가 도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