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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종교개혁과 한국교회

루터의 개혁과 한국 4. 정치

4. 정치: 루터의 두 왕국론--脫민족주의와 脫국가주의

루터는 1520년 소책자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를 출판했다. 교회 개혁이 귀족들의 지원에 직접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단, 폭력적 농민, 과격파의 통제 처벌권을 두 왕국설에 따라 국가에게 양도했다. 그 결과 민족국가가 등장했고, 교회는 민족주의에 봉사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1930년대 후반에는 나치즘에 굴복했다.

긍정적 유산 1. 민족국가의 성립과 민족주의: 중세 봉건주의 가톨릭의 보편주의가 유지해온 유럽의 종교적 일치성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무너뜨리면서 민족 국가와 개신교가 등장했다. 일정 국경 안에서 자체의 입법 사법 행정기관을 가진 민족국가는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라틴어 대신 본토어를 사용하면서, 교파화를 완성해 나갔다. 보편적 법의 원리였던 교황의 권위 대신 국가가 법적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민족국가의 등장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30년 전쟁 후 맺어진 베스트팔리아 조약(1648)은 독일 영주들이 자신의 영토에서 천주교, 루터교회, 개혁교회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민족 국가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사울 왕정이 억압적이었듯이, 민족 국가는 국경 내의 인종적,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소수자들을 억압하고 핍박하고 화형에 처했다. 앞에서 언급한 교파화의 결과 국가의 종교 통제가 가속화된 점은 그 부정적 측면이다. 민족 국가의 주권이 강화되면서 민족주의도 강화되었는데, 미국독립혁명(1781)이나 프랑스혁명(1789)과 같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19세기 내셔널리즘은 민족 국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약소국가를 침략하는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의 국가주의로 변질되었다. 20세기에는 계급투쟁을 희석시키는 데 악용되었기에 공산 혁명들이 일어났으나, 결국 공산주의도 국가주의에 매몰되었다.

긍정적 유산 2. 루터와 본회퍼의 두 왕국론: 본회퍼는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1932)에서 루터의 두 왕국설을 수용하고, 타세적 도피주의와 세속주의라는 두 극단을 비판한다. 그는 정부와 교회가 세속적 영역(힘으로 법과 질서 유지)과 영적 영역(복음 전파)에서 다른 기능을 해야 한다고 본다. 복음만으로 사는 교회는 특정 정책 결정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비도덕적일 때 그리스도인 개인과 인도주의적 조직은 비판해야 하지만 교회가 직접 하면 안 된다. 이 점에서 그는 라인홀드 니버의 자유주의 입장과 다르다. 그러나 본회퍼는 정부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지 못할 때 (정부 본연의 성격에 반할 때)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

는 1930년대 후반 정부가 교회의 성격(복음 전파)을 간섭하려고 할 때 이를 비판했다. 정부의 요구대로 아리안 족을 선전하는 제국교회는 가짜 교회라고 규정하고 고백교회를 이끌었다. 따라서 루터의 두 왕국설이 도피주의나 세속 왕국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이라는 과격파의 비판은 성립하기 어렵다. 교회의 역할과 지위를 넘어서는 국가의 개입을 거부하고 국가와 교회의 상호 독립을 강조하는 <바르멘 선언>의 제5테제도 루터의 두 왕국설을 수정한 것은 아니다. 정부 후원을 받는 개혁자인 칼뱅은 불의한 정권에 대한 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임박한 종말론 입장에서 정부의 기능을 인정하지 않는 과격파 전통이 19세기 시한부 종말론인 세대주의 전천년설로 발전하였다.

부정적 유산 1—정교분리의 미명 하에 국가에 종속된 개신교: 유럽과 그 식민지에서 개신교는 피의 핍박을 계속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서로를 기둥에 매달아 화형에 처했다. 신구교간의 30년 전쟁 기간(1618-1648)에 800만 명이 죽었다. 개신교 국가인 영국은 12만 명의 흑인 노예를 무역선에 실어 날랐고, 개신교 국가인 미국은 그들을 채찍질하며 국가를 건설했다. 그래도 교회는 자신이 속한 나라에 충성했다. 비록 루터에서 히틀러로 가는 계보는 가짜요, 루터에서 본회퍼로 가는 복음적 계보가 중요하지만, 엄연히 독일에서 주류 교회는 국가가 나치의 손에 들어갔을 때에도 루터의 두 왕국설로 정부에 간섭할 수 없다며 정부의 비인도적 범죄에 눈을 감았다.

부정적 유산 2—소수 종파의 핍박: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노나이트 재세례파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모든 사제직을 거부하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후 메노나이트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수 없이 처형되었다. 다행히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루터란 메노나이트 연구위원회가 만나 토론하고 루터란 측이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함으로써, 2010년 7월에 루터회세계연맹총회에서 회개와 화해의 예식을 거행했다.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교파, 종교, 피조물 간의 ‘화해’는 21세기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어야 하며, 특히 핍박받는 소수자에 대한 보호와 화해 작업이 추진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 1.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 민족 기독교: 개항기에서 대한제국이 망하는 시기에 전래된 개신교는 당대의 과제인 반봉건 근대화와 반외세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기독교 문명론과 기독교 민족주의로 급성장을 이루어다. 첫째, 근대화-기독교 문명론 노선에서 개신교는 의료와 교육 사업을 통해 서양의 근대 신학문을 보급했고, 민중어인 한글로 번역된 성서와 기독교 문서로 문맹을 퇴치하고 글말의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여성 교육과 반조혼, 반처첩제, 절제 운동을 통해 여권을 신장했으며, 백정해방 등 사회운동으로 계급철폐에 기여했다. 한국어, 한국사, 한국문학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양했다. 정부나 세속 기관이 근대화를 주도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정부와 함께 개신교 기관과 교회가 근대 서구 문명을 수입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둘째, 항일독립-기독교 민족주의 노선에서 개신교는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해방이 되자 건국 세력의 한 중추가 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는 서양 기독교 국가들이 식민지 세력이어서 '기독교 민족주의'가 어불성설이었으나,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이 식민지화했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다. 1965년 이후 남한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고, 1980년 이후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이제 남북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는 더욱 더 책임 있는 행동을 할 때이다.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 2.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충성하는 교회: 동아시아에서는 국가가 종교를 통제하는 전통이 강했는데, 개신교의 정교분리 전통은 일제 총독부와 군부 정권이 기독교를 통제하고 이용하는 구실이 되었다. 19세기 말에 충군애국하던 교회는 일제시대 제국에 충성하는 굴욕을 감내하며 신사참배에 참여했고, 해방 후 냉전 시대에는 반공 노선을 강고히 유지하면서 독재 정권을 지지했다. 박정희 쿠데타 직후 한경직, 김활란, 최두선은 기독교계 대표로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의 지지를 호소했다. 한일회담에 대해서는 반일감정에서 반대했으나, 월남 파병에 대해서는 반공노선에서 지지했다. 박정희의 삼선개헌에 대해 김재준 목사 등이 반대했으나, 조용기, 김창인, 김준곤 등 유명 목사들이 지지했다. 1973년 합동의 <기독신보>는 사설을 통해 국가주의를 추진한 박정희의 유신 헌법을 지지했다. 빌리 그레함전도집회(1973), CCC 엑스플로 74(1974) 등은 유신 정권을 지지하는 성격이 강했다. 신앙은 독재를 위한 전력(戰力)이 되었다. 이런 충성스런 지지의 결과로 김준곤은 러시아대사관 대지를 증여받아 CCC 건물을 지었다. 합동의 김창인은 강남의 첫 대형교회인 충현교회를 만들었다. 교회성장은 해외선교로 연결되었고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성장하던 교회는 정작 국내의 빈민 등 소외층에 대한 관심은 적었고, 물질만능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경종을 울리지 못했다.

1970년대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추구한 국가주의는 '한국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국사학은 내재적 발전론으로 한국 자체 모델로 근대화(자본주의 경제발전)를 이룰 수 있다는 민족 사관을 제시했다. 민경배의 교회사학은 민족 교회론으로 응대하며, 서구 선교사를 한국 문화전통을 부정한 근본주의자요 문화제국주의자로 비판하고, 성찬식이 없는 교회론 부재의 부흥회적 신비주의 신학을 이식했다고 폄하했다. 민족주의와 기독교 승리주의에 매몰된 그의 '민족교회' 사론은 1970-90년대 한국교회의 급성장을 정당화했다. 그의 민족국가주의 사관에는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전투하는 교회론이 들어설 여지가 적었다.

국가주의는 일종의 면벌부(indulgence)와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전체주의라는 마약을 복용(복종)함으로써 거짓 안전을 확보하는 정치적 중독(indulgence)의 방법이다. 1950~70년대 불안의 시대가 요청한 것이 국가주의 숭배였다. 한국에서는 민족주의라 쓰고 국가주의로 읽으면 된다. 이승만, 박정희, 김일성 등 모두 민족주의를 내세웠으나 기실 독재 국가주의로 갔는데, 그것을 불안한 '국민’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한국 개신교 주류는 국가의 시녀로 봉사하며 정권의 보호 속에 특혜나 이권을 받거나 이미 확보한 기득권의 보호에 치중하고 있다. 본회퍼가 정리하고 실천한 교회 본연의 성격(복음 전파)을 수호하기 위해 불의와 싸우는 전투적 교회의 저항적 정치신학을 발전시킬 때이다. 교회를 도피주의나 세속주의로 빠지게 하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부터 벗어날 때이다. ©옥성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