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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지도, 그림, 사진

처형의 역사, 1864-1950

한국에서 일어난 슬픈 십자가형과 처형의 역사​,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도

1. 한국에 들어온 첫 예수의 십자가 처형도

1636년 병자호란 후 인조가 항복하자 자청하여 청의 인질이 된 조선의 소현 세자(昭顯世子, 16121645) 1644년 선양에서 베이징으로 옮긴다. 1644년 음력 9월 명나라 정벌을 위해 나선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게 된다. 이때 독일인 신부 아담 샬 등의 예수회 선교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통해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접했다. 소현세자는 신문물과 천주교를 조선에 전하고기 위해 아담 샬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당시 소현세자는 아담 샬이 편찬한 <進呈書像> [Images Presented to the Emperor] (北京, 1640)을 보고 예수의 생애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삽화 한 페이지에 설명 한 페이지를 넣은 예수의 생애로, 전체 48개의 목판화가 들어가 있다. 생애와 교훈(예, 씨뿌리는 비유, 탕자의 비유)을 담았다. 소현세자는 이 책을 기본으로 천주교를 비판한 <不得已>(1664)도 보았을 것이다. 

인질 9년 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2월 그가 한양으로 돌아올 때, 중국인 천주교인이 함께 왔으며, 여러 십자고상을 비롯한 천주교 성물을 가지고 왔는데,  <進呈書像> 한 부도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귀국 후 그의 개혁 사상, 친청 태도, 천주교 도입 의지는 인조의 의심과 양반 귀족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결국 1645년 5월에 보수파에 의해 독살(?) 당하게 된다.  

오른쪽 그림은 독일 예수회 신부 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2–1666), 進呈書像 [Images Presented to the Emperor] (北京, 1640)  43번(106쪽)이다. 한국인이 본 첫 예수 십자가 처형도의 하나이다. 

조선 유학자들은 이후 청과의 교류를 통해 이와 비슷한 예수의 생애에 대한 화상을 보게 되는데, 서양인들이 섬기는 천주 예수가 어떻게 가정도 꾸리지 않은 채 국가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될 수 있으며, 어떻게 서양인들은 그런 불효 불충한 자를 신/하나님으로 섬길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천주교의 조선 유입과 신자 발생이 1770년대까지 연기된 배후에는 이런 신학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예수의 생애를 처음 자세하게 알고 그의 십자가 처형의 의미를 이해했던 소현세자. 그의 조선 개혁의 꿈이 좌절된 해 1645년, 벌써 370 여년이 지났다.

2. 최제우, 토마스 목사, 김개남 참형도 / 최시형 교수형도

1864년에 4월 15일에 처형된 최제우 참형도, 1866년 9월 2일 평양 대동강변 토마스 목사 처형도, 1898년에 6월 2일 울 단성사 뒤 육군 법원 처형된 최시형 교수형도이다. 상상화들이다. 1894년 12월 13일 참형 후 종로에서 효수된 김개남의 머리는 사진이다.

최제우 참형도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참형도

전투 중에 갓 쓴 주민들이 가까이 모여서 보는 참수형 장면은 불가능하다. 당시 제너럴셔먼호 대포소리, 평양성 군인들의 대포소리에 주민들은 모두 놀라 혼비백산 도망을 치고 없었다. 일부가 멀리서 바라보았다.

김개남 효수, 1894년 12월 13일
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1898년 6월 2일

갑오개혁으로 참수형은 폐지되고 최시형 2대 동학 교주는 1898년 6월 2일 단성사 뒤 육군법원에서 교수형에 처해 졌다. 

3. 예수의 십자가형 그림 소개됨, 1895년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한 <성경도설> (Bible Pictures, 1895)에 나오는 예수의 십자틀에 못박힌 장면이다. 아마도 한국개신교가 발행한 첫 십자가 처형 그림일 것이다. 이 책은 번역서이므로 서양화를 그대로 옮겨서 출판했다. 

 숭실대 도서관에서 초판에서 스캔해서 보내준 삽화이다. 

4. 죄수 집단 교수형, 1904-05

이 두 사진은 동일한 처형 장면으로 대한제국의 교수형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여러 책에서 러일전쟁이나 삼일운동 때 일본군이 한국인을 처형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1905년 교수형 장면이다. 사진에는 일본군이 등장하지 않고 한국인 뿐이다. 연구에 따르면 " 1904년 1월 2일 이후 1905년 10월 26일 이전, 대한제국 법부가 실정법을 위반한 12명의 한국인을 집단으로 교수형에 처한" 장면이다. 

위 사진은 1907년 전후  일본 회사가 발행한 엽서로, 통감부 시절 이전 한국인의 악풍습을 소개하는 엽서의 하나이다. 아래 사진은 같은 장면인데, 한국에는 해방 이후에 소개되었다. 위 사진에서 왼쪽 끝 구경꾼 어른(검은 옷)이 양산을 들고 있고, 아래 사진 오른쪽 아래에도 검은 양산들이 보여서 1890년대가 아닌 1900년대 임을 알 수 있다. 두 사진 모두 구경하는 한국인 대부분이 흰옷을 입고 있고 흰 패랭이 갓을 한 백모를 쓰고 있으므로 국상 중인듯하다. 

5.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한국인 농부 세 명 처형

서울 부근에서 군용 철도 공사로 땅을 잃은 농부들이 레일을 훼손하자, 일본군이 십자가에 묶은 후 총살형을 실시했다. 세 번째 사진은 헐버트의 <The Passing of Korea> (1905)에 실려 유명하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처럼, 세 명을 십자가에 묶고 일본군인 8명이 사격했다. 멀리서 한국인 주민들이 바라보았다.

(참고: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9227.html)

처형 준비
처형 직전
처형 후 사망 확인

6. 1907년 정미 의병 처형, 전라도

군대해산 후 흩어진 군인들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자, 일본군은 체포한 의병들을 아래와 같이 십자가에 묶고, 주민들을 불러 모은 후, 총살형에 처했다. 주민들에게 신고할 것을 강요하며 겁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 사진을 3.1운동 때 찍은 것으로 소개하는 여러 신문과 책이 있으나, 1907년 의병 처형 사진이다. 이 사진도 우연치 않게 세 명의 의병을 십자가 처형하고 있다. 위와 달리 땅을 파고 무릎까지 들어가는 구덩이에 세운 후 총살했다.

프랑스의 "L'ILLUSTRATION" 지 1907년 8월 10일자에 실려 있는 의병 처형 장면

7. 1919년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수원 지역 삼일운동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제암리 학살 사건은 4월 15일에 발생했다. 일본군은 이 지역에서 삼일운동이 강하게 일어나자 보복 차원에서 제암리 마을 주민들을 학살했다. 4월 15일 경찰과 군인이 마을에 와서 청년 23명(홍원식 권사, 안종후 권사, 안진순 속장 등 감리교인 12명, 그리고 안종환, 안경순, 홍순진, 안종린, 안응순, 안상용, 안정옥, 안종형, 안종화, 안자순, 안호순 등 천도교인 11명)을 모아 제암리교회에서 가두고 불을 지른 후 총으로 사살했다. 이어 추가로 이웃 마을에서 천도교인 6명을 더 살해했다. 살해된 자는 제암리 안씨 집안 15명, 고주리 김씨 집안 6명(김흥렬, 김기훈, 김기영, 김성렬, 김기세, 김세열)등이었다.

독립기념관에 있는 그림

8. 1948년 제주도 4.3사건

사진을 찍을 정도라면 꽤 제대로 된 처형장면일 것이다. 그래도 즉결 재판에 의한 만행이었다.

산 속의 나무에 그냥 묶고 가슴에 표적판을 붙인 후 처형했다.
대량 학살이 진행되면서 바로 구덩이에 넣고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9. 여수 순천 사건, 1948년 11

1948년 10월 19-27일 여수시에 주둔하던 14연대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마당에 묶은 채 마구 사살하는 형식으로 무차별 처형했음을 보여준다.

10. 지리산 빨치산 처형, 1950년 4월

여순 사건 때 도주한 남로당 계 군인들을 중심으로 지리산 일대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벌이던 빨치산의 처형 장면이다. 곧 1948년 봄부터 1950년 봄까지 2년간 제주도, 여수, 순천, 거창, 거제, 지리산 일대에서 많은 남로당계 공산주의자들, 빨치산들은 물론 일반 무고한 주민들이 처형되었다. 아래 사진의 경우 꽤 '양호한' 상태의 처형이었다고 생각하고 촬영을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시설로 보아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던 듯하다.

일자 나무 기둥에 손, 허리, 무릎, 목을 묶은 후 가슴에 표적판을 달고 처형했다.

1907-1910년 의병 사살자가 약 10,000명, 삼일운동 때 사망자가 약 8,000명이었다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살자는 그보다 몇 배 많은 수 만 명에 달했다. 이어서 6.25전쟁으로 동족상잔의 피해는 수 백 만에 달했다. 그만큼 식민지에서 해방된 3세계 국가들의 건국 과정은 험난했고, 냉전의 깊은 상처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다시는 주민 처형의 장면이 반복되지 않는 평화가 한반도에 임하기를 기도한다.

수난 주간에 고난의 한반도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