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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길선주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배척과 교회 분립 사건, 1925-27

옥성득, "장로교회 분쟁: 김선두, 길선주, 변인서 목사 배척 사건, 1923-1934," <기독교사상>, 2019년 10월호 中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배척과 교회 분립 사건, 1925-27 부분

1924-25년에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이 지속되면서, 평양 예수교를 비판하는 개벽(開闢) 지의 예루살렘의 조선담론이 등장했다. 군산, 재령, 해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서 반기독교 운동과 김익두 부흥회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북간도 용정촌에서는 김익두에게 권총으로 위협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평양 교인들은 반기독교 기사를 쏟아내는 개벽에 대해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기독신보는 교회개혁 논설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장대현교회는 19226월에 2년간 옥고를 치른 길선주(吉善宙, 1869-1935) 목사의 목회 15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으며, 19242월 말에는 평양의 장로교회 전체가 마페트(S. A. Moffett, 1864-1939) 목사 평양 도래 30주년과 회갑연을 거행했다.

그러나 19253월부터 길 목사에 대한 공개 비판이 시작되었다. 청주교회 사경회 때 다음과 같이 설교하자, 한 교인이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신앙의 자유와 평등을 논하고 비논리적 언사를 비판했다.  

“구한국 고관대작[유성준]들이 모두 예수를 믿는데, 군들은 그 사람들만 못하면서 왜 믿지 않느냐? 여기 있는 본 청주교회 목사로 말하면 구시절에 판사를 다녔으니 너희들에게 이리 오너라 저리 가거라 하면서 잡아다 볼기라도 칠 수 있으며 호령이라도 할 수 있는 양반으로 ‘형제여! 친구여!’ 하는데, 왜 믿지 않느냐? 또한 여기 앉은 서양 목사로 말하면 벽돌 집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는 그들로서 게딱지만 한 초가에서 등이나 박박 긁고 있는 너희들에게 간절히 ‘형제여’ 하고 말씀하여 주는데, 왜 믿지 않느냐?”

1926년에는 전국적으로 교회 분쟁이 일어났다. 성천교회에서 노동 상조회 간부 출교 문제로 전도사 설교를 방해하는 등 폭행이 발생했다. 이리교회에서 김중수 목사 배척 운동이 일어났으며, 재판 결과 목사는 해임되고 두 장로는 휴직했다. 평남 영유교회에서 치병 안수기도를 핑계로 목사가 여신도를 성추행하여 문제가 되었다. 장연교회에서 목사 반대파가 불량배를 고용해 사택에 침입하고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2611월 마산(문창)교회에서 박승명(朴承明, 1880-?) 목사의 여신도 성추행으로 분규가 일어났다. 

평양 장대현교회 분쟁은 노년층과 청년층의 대결로 시작되었다. 1926년 봄 교회 정책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찬양대 대원이나 주일학교 교사 청년들이 대부분 사임했다. 연말 공동처리회에서 회계와 사무처리에 모호한 부분이 있자 언쟁이 일어났으며 청년파에서 당회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19271월 박윤근 서리집사의 재임명을 놓고 노년층이 반발했다. 213일 장로 2인 선출 투표 때 청년파는 홍인규가 후보자가 되기 위한 득표를 받지 않았는데 후보가 된 것을 문제 삼고 당회의 부정 투표를 비판하면서 투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분쟁의 근본 원인은 새 것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낡은 것은 완전히 퇴치되지 못한, 사상적으로 과도기였기 때문이었다. “교회를 치리해 가는 목사 장로 등의 직분은 대부분이 노년이 되어 청년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고, 고식적 교리 해석과 완고한 교회 정책으로 사회와 점차 길을 멀리 하게된 데 있었고, 직접적 원인은 당회원 중에 신앙 생활에 용서할 수 없는 행동곧 기생집 출입이나 부동산 투기와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도 있는데 오히려 “청년의 의사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에 감염된” 청년들과 “교도를 통솔할 능력이 없는 노장파 당회 간 소통은 쉽지 않았다.  

분쟁이 격화되자 청년파 200명은 장대현교인 유지회(有志會)를 조직하고 최후 수단으로 217일 길선주 목사, 변인서 목사, 당회원 전원의 사임을 요구하는 불신임 사직 권고서를 우편으로 발송하고 19일까지 답장을 요구했다. 유지회는 이 요구에 불응 시 전국 교회에 선언서를 반포하고 성토대회를 열어 노년파의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발표했다. 일주일간 진남포 사경회에 다녀 온 길 목사는, 투표 건은 실수이며 불만에 찬 청년들의 불건전한 신앙 때문에 불상사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청년파는 완고한 장로와 목사를 그대로 두면 교회가 퇴영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으므로 구세대를 퇴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년파는 부랑 청년들이 경거망동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분쟁만을 일삼아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을 그르친다고 반박했다.  

시찰회가 조사하던 중, 당회가 35일 청년파 네 명(김영기, 김만형, 이병찬, 김관선)을 책벌하고, 6일 예배 때 변인서 목사가 이를 광고하자, 4명은 강단 위로 올라가 그 부당성을 말하려고 시도했다. 장로들이 제지할 때, 이 모 장로의 아들과 다른 청년들이 올라와서 네 명을 구타하면서 격투가 벌어졌다. 길 목사가 폐회를 선언했으나, 김만형은 책벌의 직권 남용을 비판하고 목사와 장로의 비행을 말했다. 수백 명이 두 파로 싸우는 모습에 여자 교인들이 통곡하자 모임은 해산되었다. 장대현교회 30년 역사에서 처음 발생한 분쟁 폭력 사태였다.  

313일 유지회는 당회의 비행과 죄악 여섯 가지를 열거한 선언서 수천 매를 예배 전에 배포했다. 시찰회는 분규가 끝날 때까지 다른 교회 목사를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하도록 조치했다. 13일에는 창동교회 이인식 목사가 설교했다. 331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임시노회는 당회파 500명을 대표하는 신하용, 홍인규, 윤유삼의 진정서를 수리하고, 사태 처리를 시찰회 7인 위원회(고려위 목사, 마포삼열 목사, 강우석 목사, 김동원 장로, 윤성운 장로, 이성휘 목사, 김선환 목사)에게 일임했다. 그 진정서는 소수의 유지파 청년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므로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로 굳게 서약한다는 내용이었다. 19274월 당시 대구에서는 남성정교회 소유권 소송에서 자치파가 승리하고, 인위적 파벌제도의 타파와 자유신앙 정신통일로 종교개혁을 내세웠다. 마산에서는 박승명 목사가 사임하자 지지파와 선교사 중심의 반대파가 충돌하고 있었다.  

장대현교회 분쟁은 특별시찰회 개최 후에도 파행과 대치가 지속되다가, 결국 노회의 결정으로 동사목사인 변인서 목사는 시골 교회에 임명되고, 길선주 목사는 19281월 성역 25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된 후 장대현교회 신도 500명과 함께 이향리교회로 분립하고, 반대파 청년들이 장대현교회를 떠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마산교회의 박승명 목사 사건,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사건, 평북 용암포교회의 분규 등에서 보듯이 당회파와 평신도파의 분쟁은 교회 분립으로 귀결되었다.

길선주 목사 별세 기사, <매일신보>, 1935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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