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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길선주

1919 삼일운동과 길선주

삼일운동과 길선주
33인 중의 한 명인 길선주 목사가 선언서에 찍을 도장만 빌려주고 사경회 약속 때문에 3월 1일 서울 태화관 선언식에 참석하지 않고, 그날 감옥에도 가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글이 있다.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이다.

길 목사는 2월 20일 가정 예배를 마치고 예정된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떠났다. 그는 은혜 중에 사경회를 마치고 사리원을 거쳐 서울로 향했으나,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3월 1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길 목사는 서울역에서 관헌에게 자기 정체를 밝히고 곧 바로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다. 동료들이 있는 감옥 안이 영광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십자가 신학이었다.

"Rev. Kil Sunju, Pastor of the Central Presbyterian Church, Pyeng Yang is reported to have arrived in Seoul late and proceeded directly to the jail and asked to be confined with the other men, as he wished to share their glory. His request, needless to say, was granted." (Korea Outbreak for Independence, Part 1 "Beginning of the Uprising," page 19.)

 

길선주 목사는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하면서 민족 의식을 길렀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차세대 지도자로 촉망받던 장남 길진형(1891-1917)이 죽자 다시 한 번 민족 운동에 참여한다. 3월 1일 12시 평양에서는 둘째 아들 길진경(18세)이 시위에 참여하여, 투옥되었다. 6개월 간 감옥을 살았다.

부흥 + 사경회 + 민족운동이었다. 길 목사는 미결수로 감옥 생활을 하며 계시록을 800독했다. 1920년 10월 청원만 했으므로  무죄 석방되었다. 서명 한 번으로 1년 8개월 동안 감옥 생활이었다. 당시 총독부는 주동자를 내란 선동죄로 하면 대외 이미지가 나빠지므로 시위죄로 몰고 길선주 등은 청원 죄목으로 하여 이미 20개월 감옥 생활을 했으므로 석방했다. 

서명,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아래 사진 1은 1909년 가족 사진. 뒤에 장남이 서 있다. 사진 2는 장남 길진형이 감옥에 간 후 가족 모습이다.

저런 집이 바로 장대현교회 목사의 집이었다.

오늘날 대형교회 목사들은 어디가 영광의 자리인지 살필지어다. 세습이 아니라, 아들을 잃고, 아들을 감옥에 보낼 각오를 하고 삼일운동 100주년을 기념할지어다.

길 목사의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입진보들이여,
민족을 위해 한 달이라도 감옥살이 한 후에 길 목사를 비판하라.

큰아들 잃고 남편 감옥가고 둘째 아들도 감옥에서 고생할 때
길선주의 아내는 얼마나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을까?
명품에 눈이 먼 대형교회 목사, 유명 선교사 사모들이여 정신을 차려라.

1909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