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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10s

1919 서울 창녀촌의 확대

1919년 11월 23일자 윤치호 일기에 다음 구절이 나온다. 삼일운동의 34인 스코필드 의사의 YMCA 강연 요약이다.

오후 3시에 스코필드 의사가 강연장을 꽉 메운 청년들에게 일본이 도입하고, 합법화하고, 상업화한 죄악에 대해 강연했다. 스코필드 의사의 강연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1. 5년 전만 해도 신정(新町) 유곽에는 100명의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400명에 이른다.

2. 어떤 일본인 윤락업소 주인은 이 악덕사업에 5만 엔을 투자했고, 29명의 창녀들을 두고 있다. 이 창녀들은 각자 한 달에 100~150엔을 벌어들이고 있다.

스코필드 의사는 조선 청년들에게 사람답게 이런 끔찍한 죄악에 맞서자고 호소했다.

신정(신마치)의 공창촌은 지금의 퇴계로 아래 동국대 앞 그랜드앰버서더호텔 자리 주변이다. 1904년에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주둔한 명동성당 부근 임시 주둔지에서 가까운 공터인 이곳을 일본 거류민회가 토지를 매수해 신정 유곽(요시와라) 단지를 만들고 영업을 시작했다. 일본인, 조선인을 막론하고 서울에서는 신정에서만 창기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의 차지료는 일본인 거류민회의 중요 재원이 되었다.

이후 통감/총독과 부총독 관저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일본 군인과 경찰 등을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 기생/창녀가 늘어났다. 그러나 1915년 100명이던 창녀 수가 삼일운동 후 한국인 청년들의 정신을 파괴하기 위한 총독부의 검은 정책으로 인해서 4배나 늘였다.

사실 1919년 삼일운동 발발 원인의 하나가 한국 소녀의 인신매매였다. 많은 소녀들이 창녀로 팔려 유곽으로 갔고, 인신매매되어 만주로 팔려갔다. 1938-45년 위안부와 유사한 인신매매가 이미 1910년대부터 성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