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6일 윤치호(1865-1945) 씨가 개성 자택 고려정에서 노환(뇌일혈)으로 병사했다. 81세. 여러 신문은 그의 사망 기사를 간단하게만 실었다. 다음은 <조선일보> 12월 8일 기사와 장례식 광고이다. 다른 신문에도 동일한 광고가 실렸다. 장지는 충남 아산이었다. 어떤 학자는 그의 자살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또한 위키백과에 사망일을 12월 9일로 적고 있으나 수정해야 한다. 한 시대를 장식했던 인물 치고는 부고 기사가 초라하다.
윤치호는 1937년 만주사변(제2차 중일전쟁) 때부터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 참고로 윤치호는 1937년 9월 3일 남산 조선신궁에서 만주사변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원제의 대표자였다. 이때 4천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今月 三日에는 京城에서 京城 一流 사람들이 發起하야 尹致昊 氏가 그 代表者가 되어 國威 宣揚 武運 長久의 祈願祭를 朝鮮神宮 廣前에서 執行하엿다。 나도 此祭에 參列하야 이 熱烈且壯嚴한 祈願祭에서 깊은 感激을 받엇다。-- "朝鮮同胞(조선동포)의赤誠(적성)에 對(대)하야: 大野 政務總監(대야 정무총감)의 放送 要旨(방송요지)" <동아일보>, 1937년 9월 11일자
이후 그의 행적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1937년 7월 국방헌금 5,000원
9월 만주사변 기원제 대표로 남산 조선신궁에서 기원제 주도
9월 제2회 시국강연대 평양, 남포 강연
12월 남경 함락전첩 봉고제 조선 신궁에 참여
1938년 2월 지원병제 축하식 참여
5월 국방헌듬 5,000원
6월 국방헌금 2,000원
6월 지나사변 1주년 기념 내선일체를 위한 58개 단체 망라 총동원조선연맹 대표
10월부터 각지 시국 순회 강연
1939년 2월 지원병 후원회 결성
6월 국방헌금 2,000원
1940년 6월 伊東致昊로 창씨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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