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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2020s

기독교의 공공성/사회성 논의로 족할까?

"사회적 목회" / "사회적 교회" / "사회적 기독교"

교회가 침체 쇠락하던 1920년대에 이미 유행했던 대안이다. 1926-29년도 교계 신문이나 잡지를 펼쳐 보라.

사회 문제---생업 문제, 경제 자립 문제, 실업 문제, 계급 문제, 청년 문제, 여성 문제, 농촌 문제, 노동 문제, 민족 문제, 이민 문제, 술 문제, 공창 문제, 마약 문제, 이혼 문제, 비행 청소년 문제, 자본주의 문제 등등 --를 해결하는 기독교를 엄청 토론했다.

사회의 기독교화를 논하기 전에, 기독교의 사회화가 우선 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1925-29년에에는 기독교의 갱신과 사회화에 대한 요구가 폭발했다. 위는 한 짧은 기고문, <기독신보>, 1927년 2월 16일

영어 책, 일본어 책도 번역 출판하고, 세계 여행도 하고, 동아시아나 세계 여러 나라와 교회와 비교하면서 지적 지평을 넓혔다. 가가와 도요히꼬(하천풍언)도 소개했다. 조선의 간디 조만식 장로가 '경제 민족주의'인 물산장려운동을, 이상재 선생 등의 민립대학설립 운동, 안창호의 한국독립당 운동도 시도했으며, 1927년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시대와 병진하는 교회, 과학과 종교의 조화, 시대 사조와 보조를 맞추는 교회,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교회, 차세대를 교육하는 교회, 구제하는 교회, 빈민 선교, 나병환자 선교, 결핵 환자 선교, 절제 운동, 해외 선교 운동, 신간회 운동 참여, 독립운동 지원, 선교사로부터 한국 교회와 한국 신학의 독립, 교회 토착화, 포용성, 탈교회 현상, 기독교 사회주의 등등을 토론하고, 강연하고, 논문을 쓰고 책을 출판하고 실천했다.

다만 오늘 한국 교회가 토론하는 미션널처지나 사회적 선교 수준이 그 때에 미치지 못하는 면이 많다. 그 동안 교회가 역사와 현재 사회와 소통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교회라는 우물 안에 갇혀 좁은 하늘만 바라보았다. 교회 성장으로 교회 우물 벽만 높이 쌓았다.

1920년대의 사회적 교회론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듯이, 오늘날 선교적 교회론이 한국 교회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되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교회가 이미 자본주의에 점령된 식민지 상태에서, 한국사회의 기독교화는 공염불에 그치고, 대형 소형을 막론하고 개교회 각자도생도 힘든 상태에 목회자가 지쳐 있으니, '미션얼 처지'는 말만으로도 부담이 된다.

그래도 1920년대 반기독교운동, 신구 세대 갈등, 대형교회 분쟁, 사회 기독교 운동 등을 다시 들여다보고 공부할 필요는 있다. 그때의 고민은 수입된 미션얼 처지론을 우리 한국교회 자체에 맞는 선교적 교회론으로 만드는 거름이 될 수 있는 우리가 고민한 사회적 기독교론이기 때문이다.

2018. 6. 23. 1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