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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20s

1924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끈 박복영 선생

아래 박창수 박사의 글에서 앞 부분 전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1924년 암태도 소작 쟁의를 실제적으로 이끌었던 박복영에 대한 글이다. 일부 사실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지만 1924년 8월 30일, 지주 문재철과 담판을 하여 소작인들에게 유리한 여러 조항을 받아낸 인물이다. 

박창수, "박복영 선생과 문준경 전도사- 사회적 책임과 전도가 용서와 만날 때," <예수원>, 2012. 1. 17. http://www.jabbey.org/bbs/bbs/board.php?bo_table=common&wr_id=2904&sfl=.&stx=&sst=wr_hit&sod=asc&sop=and&page=72 

박복영(朴福永, 1890-1973)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암태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릴 때 한학을 했지만, 1908년에 목포 성경학원에 들어간 후 기독교 전도 사역에 헌신하였다. 1919년 삼일 운동 당시, 선생은 목포에서 기독교인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수백 명의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6개월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선생은 1920년에 석방된 후, 고향인 암태도로 들어가 ‘암태 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물산장려운동과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 ‘여자 강습원’을 설립해서 여생도 40여명을 교육시켰고, 1922년에는 ‘암태 사립 3.1학사’를 설립하여 학사장을 맡았으며, 1923년에는 야학을 6개소(나중에는 12개소로 증가)나 설립해서 30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교육 운동에 매진하였다.

선생은 1923년, 수확량의 7-8할에 이르는 살인적인 고율의 소작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회원을 중심으로 ‘암태 소작인회’를 조직하도록 하여, 1924년까지 이어진 암태 소작쟁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선생은 암태도에서 해마다 3천석의 소작료를 걷고 있던 지주(地主) 문재철과 담판하였으나 거절당했을 때, 성경의 ‘출애굽기’를 떠올렸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해 이집트 왕과 몇 차례나 담판하였으나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역사는 성취되었다. 소작농민들은 단결하여, 1923년 가을 수확기에 벼 베기를 거부하였고, 일제 경찰의 갖가지 위협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1924년에 지주 측과 물리적으로 충돌한 소작농민 13명이 목포 경찰서에 구금되자, 암태도 주민들은 배를 타고 목포 경찰서로 몰려가서 아사(餓死)동맹의 농성을 결행하였다.

“보라! 저 600여명의 남녀노유(男女老幼)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생명까지 내어놓고 법정에서 천(天)으로 더불어 이불을 삼으며 지(地)로 하여금 요를 삼고 수 삼일을 기아(飢餓)하면서 주린 창자를 움켜잡고 마르는 목을 견디면서 13인 형제의 방면을 애호비읍(哀呼悲泣)하는 비절참절(悲絶慘絶)한 애경(哀景)을 보라!”(<동아일보> 1924년 7월 17일자)

암태 소작쟁의는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 언론의 적극적인 보도에 의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하는 데 지주 문재철이 동의하는 성과를 올림으로써,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 운동이 되었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윤성덕 목사와 함께 상해로 가려다가 신의주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3개월간 구류를 당하기도 했고,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책임을 맡아, 상해와 국내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선생은 1925년에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부탁하는 이시영 선생의 밀서를 갖고 국내로 잠입하여 이상재 선생에게 무사히 전달했지만, 모금 활동을 하던 중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선생은 출감한 후에도 1926년에 ‘암태 남녀학원’을 설립하였고, 같은 해에 동아일보 목포지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 암태도 옆에 있는 자은도에서 소작쟁의 운동을 배후에서 이끌다가 광주 형무소에 1년간 수감되었다. 선생은 출감한 후에는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하였는데, 암태 소작쟁의 당시의 지주였던 문재철이, 독립운동 자금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 온 선생에게, 거액을 쾌척한 일화는 유명하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부 경무 주임, 해방 후에는 무안군 건국준비 위원장을 역임했다.

위 글에서는 기존 7-8할의 소작료를 4할로 대폭 낮춘 것을 강조하지만, 소작인을 위한 다양한 다른 조항들도 지주 문재철로부터 양보를 받아 내었다. 합의사항 첫 보도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화해조건 7개 항만 보도되었다.

소작료 4할, 1할은 농사장려자금으로 소작회가 관리한다

그러나 8월 30일 아래 협정서 세목을 만들었다. 협정서 세목 전문이 <조선일보>, 1924년 9월 11일자에 실려 있어 인용해 본다. 이 세목을 분석할 때 당시 소작쟁의의 목표 소작회의 운영, 지향점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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