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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20s

100년 전 북간도, 눈물의 성탄절

[백 년 전의 성탄절] 1920년 북간도의 크리스마스

10월 9일에서 11월 5일 발생한 경신참변 때 간도에서 4,500명의 한인이 일본군 75연대에 의해 무차별 학살되었다. 이 부대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항일 독립군에게 잇따라 대패하자 추격전을 벌이며 만주 일대 한인들을 보복 학살했다.

("봉오동 청산리대첩 관련 희귀 사진발굴," <한겨레신문>, 2010년 8월 27일자 www.hani.co.kr/arti/PRINT/437087.html

함경도 나남 일본군 19사단 예하 회령 주둔 보병 75연대 부대원
러시아군에게 총살당한 마적 대두고산, 대정 10년(1921) 7월 13일 오전 9시, 중부 복병 청산근역(靑山近驛) 구자수(邱子秀)

이 사진은 러시아군이 처형한 마적단 두목의 사진이지만, 경신참변 때에도 이런 식으로 사살하고 들판에 버렸거나 집단으로 매장했을 것이다. 경신참변은 사실 1921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학살의 와중에서 100년 전 용정교회는 성탄절을 맞았다. 자료 부족으로 그 때 성탄절을 재현할 수 없어 기고문을 쓰다가 중단했다. 다음에 자료를 더 찾아서 완성하겠다. 

2018년 말 CBS가 방영한 '북간도의 십자가'에 경신참변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1908년 중국 간도성 연길현 용정촌에 설립된 명동장로교회의 가장 이른 사진 중의 하나인 다음 사진은 흔히 1910년 예배당과 교회 사진으로 알려져 있고 이용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1926년 3월 김익두 목사 부흥 집회 때 촬영한 것이다. 

1909년 설립 당시 교회당은 그대로이다. 이들이 1920년 12월 대학살의 현장에서 성탄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1900년 전 베들레헴에서 두 살 이하 영아들이 학살을 당할 때 주변 동네까지 합해도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20-21년 경신참변 때 간도 이민 한인들은 5,000명 가까이 학살되고 수 많은 집들이 불탔다.

민족의 수난과 함께 한 간도의 성탄절, 눈보라 속에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린 성탄절이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기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예레미아 31장 15절)

성탄절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사건이요, 학살과 애통과 연관되어 있다. 무죄한 이들의 학살을 기억하는 성탄, 위로 받지 못하는 어머니들을 기억하는 고난과 십자가로 연결되는 크리스마스이다. 

하여 1917년에 태어나 1920년 12월 성탄절을 이 명동교회에서 보낸 윤동주는 뒷날 시 '십자가'를 지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20년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면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위해, 그날 용정교회 성탄절에는 교회 종도 울리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