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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례, 예배, 설교

김익두 설교집, <信仰의 路>, 1924

<김익두 설교집: 信仰의 路> (경성, 박문서관, 대정 13년 1924년 6월 25일), 88쪽. (16편의 설교)

편집 발행인 노익형, 교정 김익두 목사, 인쇄 심우택 (대동인쇄주식회사), 발행소 박문서관, 판매 신구서림.

언더우드의 <원두우 강연집> (1920)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개인 설교집이다. 김익두 목사가 남대문외교회에 부임하여 한 설교 가운데 16편을 노익형이 정리했다. 

표지 (장신대 도서관, 이원영 기증)
판권지(대정 13년)                                                                                                서언

다음은 첫 설교문인 "항상 즐거워하라" 본문 첫 페이지이다. 아래 설교문 전문을 싣는다. 김익두 목사는 유식한 일본어체인 '...적'(과학적, 근대적 등)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일상어로 대화체로 설교하여 회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부흥사로서 청중 중심의 이야기체 설교를 하고 때로는 상스러운 말도 하는 목사로 유명했는데, 이 설교에서도 대화체나 '외입' 등의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맹자 3락에 빗대어 '예수교 신자 5락' 혹은 '목회 5락'이라고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기독교인의 즐거움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점도 좋다. 

다만 부흥회 설교와 달리 남대문교회 주일 설교문이었으므로, 어려운 4자성어나 중국 경전에  나오는 고사나 맹자를 인용하고 있다. 노년층에게는 이런 문자나 고사가 익숙하겠지만, 신학문을 배운 청년층에게는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설교는 대화체, 이야기체로 했겠이지만, 정리하는 과정에서 세로쓰기에, 띄어쓰기가 적고, 한자를 많이 넣어서 청년들이 설교집을 읽기에는 불편했다. 따라서 학생이나 청년들과의 소통은 실패했다고 본다. 아쉬운 점이다.

편집자인 노익형이 김익두 목사의 설교나 부흥회가 무식하다는 비판을 의식해서 한문 문자가 들어간 문체로 바꾸었을 수도 있다.  이 설교에서 김익두 목사는 사회주의자들이나 청년들이 자신과 기독교인을 미신을 믿는 자라고 비판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이를 변증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김익두, “항상 즐거워하라” <신앙의 로>, 1924.

항상 주안에서 즐거워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즐거워하라 (빌립보 4:4)

이글을 쓸 때는 바울의 손목에 철사가 감겼을 땐 줄로 압니다. 그런고로 자기는 이 같은 고생에 있으되 평안한 자리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항상 즐거워하라 함이외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믿는 사람이 무슨 재미와 낙이 없는 줄로 아는 자 많습니다.

내가 어떤 때에 어떠한 청년을 만나서 믿기를 권고한즉, 그 청년은 말하기를 "무슨 재미로 이같이 젊은 사람이 예수를 믿겠습니까? 후일에 늙어서 믿겠습니다."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 사람들 다 우리가 맛보는 즐거움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즐거움은 무엇으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자녀를 낳아서 공부를 많이 시켜 좋은 사람 만드는 것이 큰 재미이오니까? 아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큰 재미라 하겠습니다. 또한 부귀영광을 누리며 고루거각(高樓巨閣)에 호사하는 것이 즐겁고 재미라 하겠습니까? 물론 세상에서는 이보다 더 큰 재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재미가 몇 날이나 가느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바이외다. 오늘 자녀에 재미를 보던 사람이 명일에 비애(悲哀)로 끝난 사람이 몇이나 되며, 오늘 부귀영화에 호화롭게 지내다가 내일에 기근을 부르짖는 사람이 얼마오니까? 이 세상의 낙과 재미는 다 이와 같이 오늘 낙이 내일의 비애가 되고 오늘 재미는 명일에 걱정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믿는 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어 한번 맛보면 늘 그치지 않고 항상 강같이 흐릅니다. 이제 낙(樂)이 무엇인가 생각하려합니다.

1. 감응(感應)의 낙(樂)

여러 형제자매여 오늘 이 즐거움을 맛본 이가 있습니까? 이 즐거움은 세상 사람이 어떠한 영화를 다 맛본다하여도 이 즐거움은 맛보지 못할 것이외다.

여러분이여, 옛날 은왕성탕(殷王成湯)이 자기 나라에 큰 한재(旱災)가 내려서 온 백성은 다 죽을 지경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탕왕은 목욕재계하며 전조단발(剪爪斷髮)하고, 상림(桑林) 뜰에 나아가서 친히 제물(祭物)이 되어 육사(六事)로 자책(自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신은 즉시로 대우(大雨)를 수 천리에 내리어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소생케 하였습니다. 이때에 백성의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탕왕의 즐거움이야 어떠하다고 비(譬)하여 말할 수가 없을 것이외다.

여러분이여, 세상 국왕도 우리의 말을 듣고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준다 하면 그러한 즐거움과 영광이 없으리라고 하는데, 하물며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통할(統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약한 인생의 기도를 들으실 때 얼마나 기쁘며 만족하겠습니까? 이것은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즐거움이외다. 그뿐 아니라 도리어 불신자들은 우리를 비소(誹笑)하며 비방(誹謗)하여 미신자(迷信者)라 하나, 우리의 이 같은 즐거움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바울이 옥중에서 즐거워 노래 부른 것이 이 까닭이며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무서운 기색이 없이 즐거워함이 이 까닭이며, 사르락과 아벤느고가 불속에 있으나 근심하지 않고 즐거워함은 오직 천상천하에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감응의 낙이라 합니다.

2. 영생(永生)의 낙(樂)

이 세상에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오니까? 다름이 아니라 곧 생(生)이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살며 일생이란 긴 세월을 희생합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이 문제를 해결한 자가 몇 사람이오니까? 이것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취미가 있고 이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는 곧 이 생(生)의 해결자이외다.그러나 세상 사람은 이것을 아는 자가 아직 적습니다.

사람이 한 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 없는 줄로 알아서 흔히 가곡(歌曲)에도 보면, "노자 노자 젊어서 노자 늙어 죽어지면 그만이니 아니 놀고 무엇할까" 하는 것을 보아도 세상 사람은 전혀 생이라는 것은 이 육체를 가진 요동안 육십년이나 칠십년간 계속하고 그만 종결이 되는 줄로 아는 것을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종종 언사(言辭)에도 비애(悲哀)를 말함이 많습니다. 내가 보기는 온 천지에 금수 곤충은 다 그 주재(主宰)를 찬송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다 그것을 가르쳐 「운다」란 명사(名辭)를 붙였으니, 그것을 깊이 연구하면 다 세상은 이 생(生)의 젊은 세월인줄로만 생각하는 인생이 다 만물이 자기와 같이 슬퍼하는 줄로 알고 하는 말이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생이 있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울며 근심하겠습니까? 우리는 도리어 이 세상을 가는 것이 영광이요 낙이외다. 그러므로 바울도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여러분이여 생을 구하십니까? 믿으시오,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아~ 우리는 즐거워합시다. 영생의 낙이 있습니다.

3. 도미(道味)의 낙(樂)

내가 어떤 때 어떤 지방에 가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당신은 무슨 재미로 예수를 믿습니까? 사람이 한 번 이 세상에 나서 그 맛 좋은 음식이라든지 또 외입(外入) 같은 것은 남아로 한번 지내볼만한 것인데, 그것 다 제(除)하여 버리니 무슨 살 재미가 있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때에 나는 얼른 이 성경을 들어 가르치면서 전도한 일이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의 불신자편에서는 주색잡기를 인생의 제일낙이요 쾌미(快味)로 압니다. 그러나 나의 낙과 쾌미는 좀 달라서 세상 사람은 감히 얻어 볼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여, 저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산이 높고 물이 맑게 흐르는 땅 자연계의 아름다움을 볼 때, 그 누가 그 속에 낙과 쾌미가 있는 줄 알겠습니까? 옛날 다윗 밖에는 자연계의 아름다움을 보고 찬미한 이가 없는 줄로 압니다.

여러분이여, 오늘 이 자리에서 더 자연계의 현상을 살펴보시오. 무한한 취미와 즐거움이 옵니다. 저와 같이 백설이 가득하고 찬바람이 불지만은 멀지 않아서 이 세월은 다 지나가고 백화난만한 춘삼월호시절이 돌아오겠으며, 얼른하여 녹음이 우거져 황조(黃鳥)는 노래하다가 백곡(百穀)이 풍등(豊登)한 가을이 돌아오면, 자연(自然)히 세월이 가는 줄 모르게 고생하던 농부들은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게 되겠습니다. 아~ 천지대자연은 이같이 변치 않고 끝없이 돌아가서 우리로 무한한 위안과 취미를 줍니다. 오늘 누가 이 자연을 노래하며 즐긴 이가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쾌미 있는 생활이외다.

그뿐 아니라 주는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막막한 황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 주와 같으신 목자가 없어서 도저히 건전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위를 주심이 좋은 목자가 양을 풀과 맑은 시냇가에 인도하는 것 같아서 늘 정신이 상쾌하고 원기가 충만하여 멀리 가서 춘풍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가슴에 늘 춘풍이 불어오며 위안과 즐거움이 소사 넘치어서 내 몸이 약하나 강하나 부하나 빈하나 항상 녹초(綠草)와 청계(淸溪)에 누운 양과 같으니 오늘 이것을 맛보는 이가 누구오니까? 오직 주를 믿고 도미(道味)적 생활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 악취가 나는 주색잡기에 비교하겠습니까? 여러분이여 이와 같은 도미적 생활에 무한한 쾌미를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4. 여주동행(與主同行)의 낙(樂)

우리는 자기보다 지식이 많고 인격이 고상한 사람을 사귀여 놀기를 원합니다. 사실로 친구를 교제할 때 나보다 지식도 낫고 인격도 고상한 사람 사귀게 되면 그러한 영광과 행복은 없을 줄로 압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연히 그 사람과 같이 될 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하물며 우리 주 예수와 같이 동행하여 따라가는 사람이겠습니까? 옛날 아브라함과 야곱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으며 모든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이 많았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지내여 갈 때 하나님의 도움이 때때로 많습니다. 어떤 때에는 전도하다가 말이 막힌 때나 혹 강도(講道) 할 때나 위험한 일을 당할 때 능히 나아갈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을 우리가 늘 경험하는 바이외다. 이것은 곧 우리 주와 동행하는 증거이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나 깨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만나나 생각하면 즐거움뿐이외다. 우리 신자는 즐거워하며 찬송하고 기뻐합시다.

5. 교인양성(敎人養成)의 낙(樂)

자녀를 기르는 낙은 생산하지 못하는 부인에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실로 자녀를 생산함이 수고가 되지만은 그 자녀가 잘 자라서 후일에 사회에 유용한 재목이 되면 여간한 생산 시나 양육 시 간난신고는 다 잊고 말 것이외다. 그와 같이 우리 신자도 특별한 낙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아가 전도하여 나온 형제가 점점 신앙의 취미를 얻어 진실을 붙들게 되면 그것처럼 큰 즐거움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옛날에 맹자도 삼락(三樂)이 있는데 제일은 부모구존(父母俱存)한 것이요, 제이는 천(天)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요, 제삼은 천하영재를 모집하여 양성함이라 하였습니다.

사실로 이 취미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도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 너희는 나의 낙이요 면류관이라고한 말씀을 보면 과연 바울도 이것을 기뻐한 줄로 알겠습니다. 여러분이여 다 이러한 취미를 보십니까? 교인을 얻어 양성하는 낙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이 같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행복이라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바울이 말씀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즐거워하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하나님이 감응하시는 낙을 얻고자 하시면 항상 기도하시오. 주가 늘 들으시겠습니다. 영생의 낙을 얻고자 하십니까? 성신 받으시오. 성신 받아야 영생이 있겠습니다. 도미(道味)의 낙을 얻고자 하십니까? 성경을 읽으시오. 자연의 큰 즐거움을 발견하오리다. 주로 동행하는 즐거움을 얻고자 하십니까? 순종하시오. 아브라함도 순종함으로 의인이라 하였습니다. 교인을 양성하는 낙을 얻고자 하십니까? 전도하시오. 바울도 고생을 아끼지 않고 전도함으로 교회를 많이 세워서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형제자매여 우리 즐거움과 취미를 잊지 말고 항상 찬송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