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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10s

1910. 3. 26 안중근 순국

3월에 생각나는 사람
토마스 (多默) 안중근 장군

1909. 10. 26 동양평화를 위해 이또 히로부미 하얼빈 역에서 사살 
1910. 2. 14 재판정에서 사형 판결
1910. 3. 26 사형

사형 직전 사진

 

순국 이틀 전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

"우리는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배려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헤어지게 되었소. 

그러나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께 효도를 다 하시오. 

두 동생과 화목하며, 자식의 교육에 힘쓰길 바라오. 

심신을 편안히 하고, 후세에 영원한 복락을 희망할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결심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하느님께 바치어 장래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허다한 말은 후일 천국에서 기쁘게 만나서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3월 24일 장부 안 도마 拜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 여사와 두 아들(진남포 거주), 하얼빈에서, 1909. 10. 27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3월 26일 오전 10시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나이 32세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