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안중근 어머니의 그런 편지는 없었다
2018. 8. 19. 15:26 ⓒ옥성득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을 앞둔 아들 토마스 안중근(安重根, 1879. 9. 2. - 1910. 3. 26)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편지는 다음과 같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그러나 이 편지나 그에 대한 안중근의 답장도 글로 남아 있는 자료가 없는 허구이다. 후대의 누군가가 작문한 글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 당시 쓴 그런 글이 1차 사료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면회를 했을 때 어머니가 지은 수의를 전달하고, 사형 판결을 받는다면 깨끗이 죽어서 명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라는 말을 전달했다고 한다. -- <만주일일신문>.
한국의 어머니는 일본의 극소수 어머니와 달리, 나라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개인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모성이 애국심보다 더 강하다. 그게 한국의 어머니이다. 또한 천주교 신자로서 아들에게 후생에 천부의 아들로 환생하라는 말은 교리상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 기쁘게 천국에서 만나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감동적이라면 허구도 좋아하고 퍼나른다. 2014-15년 한국 사회를 움직인 가짜 사료. 영웅 만들기를 하면 조작이 될까? 아직도 한국은 영웅이 필요할 만큼 혼란하고 국가 위기인가? 영웅이 아니라 깨어 있는 일반 시민이 나라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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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집행 5분 전 안중근의 모습, 어머니가 지어 준 수의를 입고 있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3월 26일 오전 10시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나이 32세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참고 4: 안중근 시성식 관련
추가, 2023. 1. 2
혹자는 다음 기사를 근거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의 뜻을 확대 해석하여 그런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한다. 편지와 상관 없는 내용이다. 원문을 약간 현대어로 고쳐서 읽어 보자.
시모시자[그 어머니에 그 아들]. 안중근 씨의 모친이 변호를 의탁할 차로 평양에 도착하여 안병찬 씨와 교섭할 시에, 당지 경찰서와 헌병대에서 순사와 헌병을 파송하여 누차 힐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은 용모 자약하고[흐트러짐이 없고] 응대 여유하여[물 흐르듯이 하여] 왈 "중근의 금번 소행은 그 유래한 것이 오래되었다. 러일전쟁 이후로 주주야야 언언사사가 단지 위국 헌신적 사상에 있었고, 평일 집에 거할 때에도 매사를 정당주의만 사용하고 추호도 사적 감정을 사용하지 아니하므로 집안에서 엄숙하였고, 연전 국채 보상금 모급 때에도 그 처와 형수가 시집 올 때 패물 등을 모두 기부하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이미 망하였다. 무슨 물건을 아까워하리요' 하매 그 여러 형수도 함께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여 그 뜻을 조금도 어기지 못하였다." 하며 안 씨의 역사를 꺼리낌 없이 설명하매, 순사 헌졍들도 서로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안중근의 행사는 우리가 심히 크게 놀라움을 금치 못한 바거니와 그 모친의 사람됨도 한국에 드문 인물이라" 하였더라.
즉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거사가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애국심에서 한 것을 알고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일본 순사나 헌병 앞에서도 당당히 그 거사의 정당과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그래서 결국 사형이 확정되자 수의를 지어 보내면서 진정한 애국자로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고, 그 영혼을 천주에게 부탁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 돌아다니는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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