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의료, 간호

적십자병원 전쟁 간호가 삼일운동으로 민족 간호로 전환

러일전쟁으로 발전한 적십자병원의 전쟁간호가 삼일운동으로 민족간호로 전환되다, 1904-1920

                                 

1. 러일전쟁과 나이팅게일 적십자 간호의 발전, 1904-1910

1904년 2월 8일 인천해전에서 시작된 러일전쟁은 한국 간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훈련된 일본 간호부의 활동은 한국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1905년 7월 대한 적십자사병원의 설립을 가져왔으며, 정부 차원의 간호학교를 구상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그러나 일본 의료와 간호의 식민지성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열매를 맺기 전에 한국 정부의 간호 사업은 메말라 죽고 말았다.

제물포 적십자병원, 1904

제물포적십자병원에서 일본인 간호부의 돌봄을 받는 러시아 군인들, 1904 (일본의 선전 엽서)

러일전쟁 발발 이튿날 일본군은 일본적십자병원 간호부들이 러시아 해군 부상병들을 간호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그 사진들을 언론사에 배포하여 일본의 앞선 근대적 의료 기술과 도덕적 우위를 선전했다. 일본 육군은 인천과 평양에 두 개의 적십자사 병원을 설립했고 해군은 적십자사 병원선을 파견했다. 전투 부대들을 따라 32개의 야전의무반이 운영되었는데, 각 의무반은 의사 2명, 약사 1명, 수간호원 2명, 간호부와 조수 20명으로 구성되었다. 일본 적십자사 병원은 1880년대부터 근대 일본을 상징하는 기구였다. 1905년 당시 4,700명의 남녀 간호부가 일하고 있었다. 일본 의료와 간호는 독일과 영국의 모델을 수용하여 발전했는데, 일본군의 위생과 부상병 치료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의주에 설치된 야전 적십자병원

일본 황실은 적십자사 간호 사업을 적극 지원했는데, 전쟁 중에는 왕비가 직접 부녀과 모임에서 부상병용 반창고를 만들었다. 국제 적십자사는 유럽에서 인류애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창설되었으며, 적십자사의 나이팅게일 유형의 간호사는 공공 사회의 일원으로서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을 돌보는 강인한 남성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황실 가족과 신도의 제사장들이 후원했으며, 일본의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적십자병원을 보편적 인류애, 일본의 근대 문명, 장병을 돌보는 황은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적십자병원 간호부는 제국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애국자 이미지와 희생과 봉사와 순종의 미덕을 지닌 유교의 전통적 여성상으로 제시되었다. 즉 일본 적십자사 간호부는 근대 문명과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남성적 야전 병원에서 전근대 가치를 유지하는 여성으로 차별을 받았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적십자사의 식민성과 성차별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부상병에 대한 신속한 치료와 탁월한 의술을 칭송했다. 1904년 9월 이준, 이현석 등은 한국 적십자사 설립 취지서를 배포하면서, 일본 적십자 부상병 치료에 성금을 보냈다. 대부분의 한국 지도자들은 일본을 백인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양 평화의 수호자로 믿었고, 일본의 승리가 한국 독립으로 이어진다는 일본의 약속을 믿고 있었다.

대한국 적십자병원, 1906

마침내 1905년 7월 8일 고종의 칙령에 의해 10월에 대한 적십자사병원이 서울 경복궁 뒤에 설립되었다. 간호부장 1인, 간호부 5인을 두기로 했으나, 훈련받은 여자 간호부가 없어 1906년 1월 김용호와 박의호를 간호부로 임명했다. 병원은 1906년 2월에 진료에 들어갔으나 6월에 원남동 남쪽으로 이전했다. 일본 통감부의 재정 후원으로 1907년 3월 대한병원이 설립되자 그 병원에 흡수되었다. 대한적십자사도 1909년 7월 일본 적십자사에 병합되면서 사라졌다.

2. 일차대전과 의료 선교사들의 적십자 활동, 1917-19

생략

3. 삼일운동과 상해임정의 대한적십자회 간호단, 1919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적십자회 구급간호반 1회, 1919 [맨 오른쪽이 여운형]

한일합방 이후 적십자사 운동은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일본 적십자사 활동 외에,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개신교의 의사와 간호부 선교사들은 적십자단을 조직했으며, 일부 선교사는 자원 입대하여 야전 병원에 봉사했다. 한편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바로 자비와 인류애를 표어로 대한적십자회(Korean Red Cross)를 조직했다. 그 목적은 “재난이나 자연 재해가 발생했을 때, 훈련된 남녀 인원을 제공하고 자금과 물품을 수집하고 배포함으로써 체계적인 구호를 제공하고 긴급 서비스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구급 간호반(Aid Class)을 개설하고 한국인 간호부 양성에 들어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에도 대한적십자사 지부가 설립되어 활동했다. 이들의 첫 사업은 삼일운동 진압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적십자사 간호는 이처럼 일제 침략기와 식민지기에 한국 역사와 한국인의 고난과 함께 하면서 시련 속에서 그 붉은 십자가를 지켰다.

상해 임정 대한적십자의 샌프란시스코 지사가 발행한 소책자, 1920

삼일운동 후 일제의 만행과 한국의 참상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