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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승만

1905년 8월 9일 이승만이 민영환 대신에게 보낸 편지

1905년 8월 9일 이승만이 민영환에게 보낸 편지

유영익, 송병기, 이명래, 오영섭 편, <이승만 동문 서한집>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9), 29-35.

이승만(1875-1965)은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황제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5년 9개월 감옥 생활을 하고 1904년 8월 9일 석방되었다. 잠시 상동청년회 교장을 한 후 민영환의 주선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다. [여기서 고종의 밀사설이 나왔다.] 11월 29일 하와이에 도착했고, 독립 외교 활동을 구상하던 윤병구 목사를 만나  함께 워싱턴에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청원하자고 합의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머문 이승만은 연말에 워싱턴으로 갔다. 한국 공사관에서 김윤정 서리공사를 만나 외교 활동을 의논했다. 1905년 2월 20일 전 주한공사 딘스모어를 만나 국무장과 헤이(John Hay)를 만났다. 헤이는 대한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7월까지 계속 워싱턴 디시에 머물면서 대통령을 만나기를 고대했다. 루즈벨트는 6월 9일 곧 종전을 위한 러일 간 포츠머스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7월 14일 태프트 국방장관을 하와이를 거쳐 도쿄로 갔다. 그때 윤병구는 태프트를 만나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추천서)을 받았다. 이틀 전 하와이 한인들은 태프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만과 윤병구를 포츠머스회담에 파송할 한인회 대표로 임명하고 청원서를 작성했다.

7월 31일 하와이 한인 대표로 윤병구 목사가 워싱턴 디시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그와 함께 서재필과 의논하고 변호사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검토했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뉴욕으로 가서 8월 4일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에 있는 대통령 별장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8,000명 하와이 거주 한인 의 대표 자격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청원서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공사관을 거쳐 공식 문서를 올리라는 말로 돌려보냈다. 이에 두 사람은 워싱턴으로 돌아와 김윤정 공사를 만났다. 그러나 김 서리공사는 본국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 청원서 제출을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이승만은 김 서리공사를 매국노로 저주하고, 나라의 독립이 사라진다는 분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본국 민영환 대신에게 보내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를 미국으로 보내준 민 대신에게 보고하는 편지이다.) 이승만의 1905년 여름 미국 외교 활동은 실패로 끝났다. 

1905년 7월 태프트 미 국방장관이 일본으로 갈 때 하와이를 거치게 되었고, 언론은 태프트가 일본에 가서 한국의  보호국화를 의논할 것으로 예상하고 보도했다. (신문들은 20년 보호국화를 허락했다는 오보를 냈다. 이처럼 미국 언론들에도 오보가 잦았다.) 하와이 한인들은 윤병구를 대표로 루즈벨트에게 청원서를 보내기로 하고, 윤은 태프트를 만나 추천서를 받았다. 이를 언론이 알게 되면서 윤병구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어떤 청원서를 전달할지, 대통령이 어떻게 나올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일본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윤병구와 이승만이 뉴욕에서 대통령을 접견하는 날 일본 측도 대표단을 보내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외교전이 전개되었다. 동시에 언론전도 전개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힘 앞에 한국인 민간인 두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언론이 원하는 것은 윤과 이가 전달하려고 한 청원서 내용이었다. 그러나 공식 루트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두 사람은 워싱턴으로 돌아왔으나 한국 공관에서 도와주지 않자, 결국 청원서를 언론에 주게 되는데, 그 첫 신문사가 뉴저지 Asbury Park Morning Press였다. 8월 18일 자에 청원서가 나가자 다른 여러 신문도 이를 게재하거나 요약해서 보도했다. 그 이전의 몇 신문이 두 사람을 일진회 대변인이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보도한 것은 오보였다. 

루즈벨트를 만날 때 두 사람은 고종의 밀사도 아니었고, 일진회 대표자도 아니었다. 러일전쟁이 종전되고 9월 초 메인 주 포츠머스에서 회담이 열려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기 전, 하와이 한인은 농장에서 피땀 흘려 모은 돈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를 파송해서 호소하도록 했다. 윤 목사는 이승만과 함께 루즈벨트에게 독립을 호소했으나,  나라의 녹을 먹는 공사마저 협조하지 않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언론을 통해 호소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언론에도 일본을 지지하는 기자들이 많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본을 지지한 루즈벨트는 러일 간 종전을 통해 노벨 평화상을 받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이승만이 민영환에게 보낸 편지만 보아도 그가 일진회 대표였다는 말은 미국 신문 기자의 오보였음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신문들은 한 신문이 보도하면 그대로 가져 가서 재보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두 신문에 실렸다고 해서 신문이 사실인 것도 아니다. 7월부터 10월까지 미국 신문들 여러 개를 함께 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하와이에서 발행된 두 개 이상의 신문을 읽어 보면 이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다. 시간 관계 상 일일이 신문 기사들을 요약하지 않는다. 이 편지 아래 8월 17일 Asbury Park Morning Press가  올린 기사만 추가한다. 그 다음 날 청원서를 게재하기 전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편집장의 글이다. 

이 자료는 2009년에 출판되었으므로, 2011년 <한겨레신문> 기사를 쓴 기자가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자료였다. 그러나 보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