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삼일운동
이승만이 삼일운동을 주동한 것이 아니라, 삼일운동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하와이에서 전도인과 교육자로 활동, 1913-1918
이승만은 1913년 2월 하와이에 정착한 후, 하와이감리회선교회(HMEC) 선교사로 일하려고 했으나, 1914년 6월 와드맨(John Wadman) 후임으로 친일 성향의 감리사 프라이(Henry Fry)가 부임하자 갈등하게 된다. 이승만은 1913년 9월 호놀룰루 한인중앙학교 교장 직을 맡아 학교를 재편 확대하고, 1915년 7월 국민회 하와이 지부의 지원으로 1916년 초에 3에이커의 땅을 사서 여학생 기숙사도 설립했다. 1915년 10월에는 한인여학원(Korean Girls’ Seminary)도 설립했다. 그러나 프라이는 이승만의 민족 교육, 곧 한국어와 한문 수업을 반대했다. 이승만은 여학교 기숙사 완공 전에 교장 직을 사임하고, 이후 2년 간 하와이 여러 섬을 돌며 전도인으로서 한인 교회를 개척했다. 1918년 7월에 신립교회(교인은 곧 230명으로 증가)를 설립하고, 11월 북감리회에서 독립한 후, 12월에는 14개 교회가 한인기독교회 이름으로 독립 교단을 조직했다. [이 한인교회는 민찬호 목사의 지도 하에 1920년대 급성장했다.] 한편 이승만은 1918년 9월 한인여학원을 매각하고, 고등학교 건물을 빌려 한인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 사립초중고학교)으로 변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이 기간 이승만은 1912년 12월 하와이에 정착한 의동생 박용만과 결별한다. 그가 군사 무력 투쟁론, 국민개병설을 주장하고 조선국민군단(120여 명)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하와이 국민회 지부를 장악한 이승만 파는 박용만에게 자금을 지원하지 않아 1916년 10월 조선국민군단이 문을 닫았다. 박용만 파는 1918년 이승만의 ‘독재적’ 기금 사용을 문제 삼아 법원에 소송을 냈다. 이를 계기로 박용만의 연합회(26인)와 이승만의 국민회 두 파는 갈라졌다.
1918-19년 초 파리평화회의 준비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 종전이 선언되었다. 하와이 거주 이승만 지지자들은 그에게 학원 일을 접어두고 파리 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로 참석해 회의를 주도할 은사인 윌슨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도모해 줄 것을 강력히 권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는 1918년 11월 25일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를 파리강화회의와 뉴욕에서 열릴 제2차 중소국가연맹회의 한인대표로 선출했다. 이승만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19년 1월 6일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2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국민회 회장 안창호를 만났다.
1919년 2월 5일 이승만과 정한경, 민찬호, 서재필, 장택상은 뉴욕에서 만났다. 서재필은 파리에 가도 평화회의에 참가하거나 발언할 수 없으므로 돈만 낭비라는 결론을 내리고, 차라리 필라델피아에서 영어 잡지를 발행하여 독립을 호소하자고 제안했다. 국제 여론을 움직여 한국의 독립 의제를 알리는 게 최상책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파리행을 고집했다. 워싱턴디시로 온 이승만은 윌슨과 면담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피부병에 걸려 파리에 갈 수도 없었다.
2월 26일 퇴원하기 직전 정한경이 안창호로부터 받은 ‘청원서’를 이승만에게 주었다. 윌슨에게 한국 독립을 청원하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은 문서에 서명했다. (청원서 전문은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300) 이 청원서는 11월 25일자로 되어 있었으나 이 날 서명했다.
이승만은 2월 26일 국무차관 폴크(Frank L. Polk) 만나 파리 행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폴크는 파리에 있던 랜싱 국무장관과 연락한 후 3월 5일 이승만의 파리 행을 거부했다. 랜싱은 한국인이 파리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백악관과 국무성은 한국의 독립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삼일운동으로 대전환
3월 10일 이승만은 서재필을 통해 오랫동안 기다렸던 소식을 들었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낭보였다. 이 소식은 상하이의 현순이 3월 1일 전보로 안창호에게 알렸고, 안창호는 이를 3월 9일 받았다. 안창호는 3월 10일 이를 서재필에게 전보로 알렸다.
고무된 서, 이, 정 등은 원래 3월 24일 필라델피아에서 모이기로 계획한 한국 대회를 제1회 Korean Congress(대한인 총대표회의)로 확대하고, 4월 14일 그 모임을 개최했다. (150명 참석.) 이 회의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그런데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박용만을 외무부장관에 임명했다. 4월 23일 한성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박용만을 외무부총장에 임명했다.
삼일운동으로 조직된 두 개의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최고 지도자로 만들었다. 일반 국민들의 피땀으로 세워진 임정이 이승만을 세웠다.
상해 임정(의정원 원장 안창호)이 이승만에게 보낸 국무총리 임명장, 1919. 4. 11
한성 임정의 선포문에 있는 각료 명단,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에 임명했다. 영어로 Pres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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