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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이런 게 인생

1984 내가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게 된 계기: 두 사람을 만나다

나의 4월 5일: 아펜젤러 목사와 이만열 교수를 만나다

1885[고종 22] 45

오후 3 네 명의 선교사와 한 명의 선교사 부인이 기선에서 내려 작은 거룻배를 타고 제물포 항에 상륙했다. 썰물이 심해 큰 배는 부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부인의 이름은 Ella Dodge Appenzeller, 한국에 파송된 첫 목회 선교사는 Rev. Henry Gehart Appenzeller(미국 북감리회)Rev. Horace Grant Underwood(미국 북장로회), 그리고 한국 상황을 시찰하러 온 미국 공리회(회중교회,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 for Foreign Missions) 소속의 재일본 선교사 테일러(Rev. Wallace E. Talyor, MD, 오사카 거주) 의사와 스커더(Rev. D. Scudder, MD, 니이가타 거주) 의사 등 5명이 항구에 내렸다.

언더우드와 테일러와 스커더는 바로 서울에 올라가고, 아펜젤러 부부는 갑신정변 후 정세가 불안한 상태에서 임신한 부인을 데리고 서울에 오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미국공사관의 상경 불허 입장으로 제물포항에 머물러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대불호텔에 머물다가 나가사키항으로 돌아갔다. 45일 밤 언더우드는 서울에 도착해서 알렌 의사의 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첫 개신교 목사가 서울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1980년 봄

5'광주 사태'에 이어 '학원 소요 사태'로 전국에서 87명의 교수가 해직되었다. 저녁이면 박정희 대통령 가족이 모여 그의 강의를 시청할 만큼 국사학계의 스타로 승승장구하던 이만열 교수는, 전두환 군사 정권에 항의하는 성명서 작성 주모자로 지목되어 해직 교수가 되었다. 1984614일 복직 발표가 나올 때까지 41개월 동안 어려운 세월을 겪었다. 한참 일할 나이인 40대 초반에 해직 교수가 되니 막막한 심사였다. 그나마 민중 신학자들이 불러주어 특강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 그래서 고신 출신의 보수적인 역사학자가 한신대 민중 신학자들의 친구가 되었다. 한편 하용조 목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프린스턴신학교에 머물면서, 2년 간 여러 고문서실을 돌며 한국 기독교 역사 자료를 수십 박스 분량을 복사했다. 19846월 복직 소식과 함께 9월에 숙명여대 강단에 다시 섰다

19848-9월 한국 기독교 선교 백주년 기념 행사

이만열 교수는 복직은 했으나 한국 기독교 '宣敎' 100주년 기념 '行事'에 마음에 편치 않았다. 812일부터 전국적으로 기념 행사를 겸하여 빌리 그레이엄 등 부흥 강사를 초청하여 대형 전도 집회를 열었다. 100주년을 맞이한 교회는 성숙한 역사 의식 대신 성장주의,  승리주의,  물량주의에 빠져 있었다. 제일 큰 교회, 최대 규모의 예배당과 성가대, 최초의 학교 등에 몰두하면서, 개인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와 선교와 성장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만열 교수는 미국에서 수집한 자료 가운데 우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자료집을 내어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행사비의 극히 일부만으로도 자료집을 낼 수 있었으나 나서는 교회나 단체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선교사의 전기를 번역하고, 아펜젤러의 경우에는 발췌한 자료만 붙여 책을 내기로 했다.

198545

역사적 고증도 없이 45일 아침에 '연희 원씨' 종가집 후손 30명을 비롯한 여러 기독교인들이 모여 100년 전 언더우드 인천 입항 재현 행사를 했다. 45일 새벽 검은 화물선을 타고 언더우드가 성경을 손에 들고 입항한 것처럼 연기를 했다. 언더우드 패밀리를 위한 100주년 행사요, 선교사가 주인공이 된 "선교 100주년" 행사였다. 

198558

복직 후 준비했던 첫 책 <아펜젤러>가 이만열 편으로 연세대출판부에서 나왔다. 연세대에는 함께 해직되었던 김찬국 교수가 있었고, 하현강 교수와 유동식 교수도 출판을 지원했다. 복직 후 첫 작품이었다. 세 명의 후배들이 도왔다. 1부 전기는 정호영(서울대 영문과) 번역, 류해신(서울대 국사학과) 검토, 2부 자료는 옥성득(서울대 영문과)이 번역했다.

 

 이 교수님은 193858일 생이니, 아펜젤러와 80년 차이다. 47세 생일에 그 책을 출판했다. 

나와 이 교수님과의 만남

나는 198411월 이만열 교수님을 서울대 SFC(학생신앙운동, 지도교수 손봉호, 이후철) 모임에서 처음 뵈었다. 교수님은 아펜젤러 자료를 번역할 학생을 찾고 있었는데 나를 만났다. 교수님은  나를 데리고 중앙일보 사옥 맨 윗층에 있는 마이크로필름실에 갔다. 당시 서울에는 마이크로 필름을 읽을 수 있는 기계가 3대 뿐이었는데, 마침 그곳을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3일간 아펜젤러 마이크로 필름 릴 3개를 넘기면서, 그의 일기, 보고서, 편지, 설교문, 노트 등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수 백 장 출력했다. 눈을 비비며, 손으로 쓴 일기나 편지를 재빨리 읽고 임의로 판단했다. 

나와 아펜젤러의 만남

나는 그때 군대를 제대한 후 1982년 졸정제로 바뀐 대학에 1학년으로 복학을 해서 3학년 2학기가 되었고, 용산 원효로에 있는 한 통신 회사에서 야간 경비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보면서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선 매일 아침 저녁 데모로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면서 다니고 있던 때였다. 

구글 맵으로 본 원효로 회사 건물

프린터한 자료에서 영문을 판독하면서 번역했다. 자료에 빠져 들어가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양을 번역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펜젤러의 필체가 좋아 읽기 쉬운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나와는 100살 차이가 나는 아펜젤러의 활동을 보면서, 과거의 아펜젤러와 현재의 나를 대비하면서 자료를 읽었다. 188512월의 아펜젤러와 198412월의 나를 겹쳐 놓고, 나는 부끄러웠고 도전을 받았다. 아펜젤러는 1902년에 순직했다. 한국을 사랑한 참 지도자였다. 내 한국 교회사 공부를 시작하게 한 첫 사랑이다. 

18858월에 쓴 아펜젤러의 첫 연례보고서 첫 부분

45일 오후 3시 인천에 도착했으나 결국 729일 서울에 도착하여 이 보고서를 보낼 수 있었다. 서울에서 쓴 그의 첫 보고서이다.

1985년 초에 번역을 완성했다. 초고를 보신 교수님은 나에게 제안하셨다.

"옥 선생, 앞으로 한국교회사 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소? 한국 기독교사 연구할 게 무궁무진한데, 할 사람이 없어요. 영어 자료만 해도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자료가 수 없이 많아요. 옥 군은 영어를 잘 하니까 선교사 자료부터 빨리 읽어 나갈 수 있을게요."

나는 학부 4학년으로 올라갈 참이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지 결정할 때가 되었다. 영문학으로 승부를 걸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영문학을 하고 이어서 국사학을 공부한 후 신학교에 가서 교회사 공부를 하면 좋겠다는 교수님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아펜젤러와 이 교수님의 만남으로 내 인생의 방향이 정해 졌다

198569

숙대 연구실에서 드디어 <아펜젤러> 책을 받았다. 이 교수님이 "옥성득 선생, 수고에 감사하며, 이만열 드림, 1885. 6. 9"라고 서명을 해서 주었다. 감격스러웠다. 나는 교수님을 늘 "장로님"으로 불렀고, 교수님은 늘 "옥 선생"으로 높이 불러주셨다. 나로서는 내 이름이 들어간 첫 책을 만졌다. 

"우리 세대는 이것저것 잡일에 너무 시간을 많이 뺏긴 세대요. 옥 선생은 각론의 시대를 살 것이니, 한국 교회사 한 우물만 파시오. 잡문(신문 잡지 기고문)을 쓰지 마시오. 그리고 매일 학교 마치면 내 연구실에 와서 저녁 9시까지 함께 공부합시다. 내가 줄 프로젝트가 있으니 연구실에서 정리하시오."

  

그 길로 나는 주말을 제외한 매일 오후 청파동에 내려 숙대 연구실로 가는 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밤 9시 교수님과 함께 퇴근했다. 그때까지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는 교수는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이 나가면 수위가 쉬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 기독교사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 일단 들어서면 돌아갈 길이 없는 공부의 길. 그런 생활을 7년을 계속했다. 엉덩이로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책 원고 서너 권을 썼고, 논문도 여러 개, 결혼도 하고, 신학교도 가고, 아이도 셋 태어났다아련한 33년 전의 일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길이었다. 이어서 나는 유학 길에 올랐다.  (옥성득, 2018. 4.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