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옥 교수의 글 /역사에 대한 단상

1964, 한국교회사 본격적 연구를 시작하게 한 두 논문

55년 전, 1964년 해방 이후 한국교회사 연구의 본격적 논의를 시작한 두 논문 
제한된 교회론과 성령론의 프레임으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한국교회사

민경배(1935-) 교수는 29세 연세대 조교수로, 교회사학자로 첫 발을 내디디면서 연세대 총장이자 교회사 대선배인 백낙준의 선교사관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후 연세대학교 신학대에서는 민경배 교수를 비판하는 글이 나오지 않았다. 민 교수 최대의 패착이었다. 그가 60세 쯤 되었을 때,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소장 학자 몇 명을 길렀다면 오늘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사는 이렇게까지 피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1964년에 쓴 두 논문을 보자. 1. 민경배, “한국 초대 기독교의 교회 형태,” <기독교사상> 74 (1964년 3월): 82~86;  2. 민경배, "한국종교의 신비주의적 요소: 한국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 형태론 서설," <신학논단> 8 (1964. 10): 149-167. (두 잡지와 논문은 www.dbpia.co.kr에서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이 두 논문부터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민경배 교수의 시대가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세계교회 사학계는 서구교회사를 너머 ‘토착교회사’를 요구했고 (1963년 Singapore 아시아교회사 강습회와 바티칸 II의 근대화와 토착화 영향), 한국사학계는 4.19 이후 아시아 민족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민족 사관’을 집중 토론하고 있었다. (예, 민족사학과 식민사관에 대한 <신동아>, 1963년 2월호 특집) 이런 배경에서 태동하는 30세 청년 학자 민경배 교수가 쓴 민족교회론의 출발점을 점검해 보자.

1. 교회 형태
이 글은 결론에서 한국 초대교회는 교회론이 결여된 교회라고 주장한다. '말씀'과 '성령'은 있었으나 '말씀'과 '성례'(성찬)가 함께 가지 않아 참 교회가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한국 장로교회를 분석하면서, 칼빈과 녹스와 서구의 종교개혁 교회론의 틀을 가지고 19세기말 20세기 초 소위 미국식 (부흥주의/행동주의적) 복음주의 교회가 한국에 이식되면서 새크라멘트의 신비성이 결여된 부족한 교회, 저급한 교회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는 자료를 제대로 읽지 않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다. 50년 전에 이용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널리 볼 수 있는 선교사들의 1차 자료들을 읽어보면 초대 한국교회는 최소한 1년에 네 차례의 성찬식을 거행하는 전통을 유지했다. 특히 세례식 주일(대개 1년에 4차례)에 성찬식을 하여 세례를 받는 초신자들은 그날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 신앙 형태
두 번째 논문은 한국의 재래종교와 신비주의를 논한 후 한국 기독교회 내부의 신비주의를 논한다. 민 교수는 해방 이전 한국 교회는 현실 도피적인 신비주의 형태의 교회였다고 규정한다. 1907년 대부흥도 현실도피적 신비주의적 부흥이었고, 1930년대 신앙(이용도, 최태용, 황국주 등)도 건강하지 못한 신비주의가 지배했으며 그것이 대개 해방 이후 이단으로 연결된다고 부정적으로 보았다. 다만 이용도는 긍정적으로 재해석했다.

이 두 논문을 보면 교회 형태에서는 유럽개혁교회와 같은 신비성이 없고, 신앙 형태에서는 부흥회적인 신비주의가 충만한 교회가 초대 한국교회라고 하여, 1950년대의 제한된 교회론과 성령론을 가지고 미국계 복음주의 교회를 제한되게 이해한 것을 볼 수 있다. 전반적인 논지를 재정리하자면, 민 교수는 서구화를 추진한 선교사들의 문화제국주의적 신학, 성령은 있으나 성찬이 결여된 반쪽 교회론을 가진 교회, 그리고 그 성령은 재래종교와 혼합되어 현실도피적인 신앙 형태를 양산한 교회, 그것이 해방 이전 한국 교회였다고 보았다. 결국 이런 부정적인 교회론을 기초로 발전한 것이 그의 1970년대 민족교회론이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기회가 되면 그의 민족교회론의 공과를 짚어 보겠다.

한국 신학, 좁게는 한국교회사 연구가 왜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결과 교회가 정체되고 침체되는가? 중요한 한 이유가 바로 선배 교수들의 신학을 비판하지 못하는 관행 때문이다. 그들은 선각자로서 마땅히 존경받을 분들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만한 업적을 이룬 분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문을 비판하는 것이 그들의 인격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학자의 운명은 후배에 의해 비판을 받는 것이고 그래야 학문이 발전한다. 그래야 한국 신학이 살고 한국 교회가 산다. 50년 전 한 젊은 학자의 한국 교회사 첫 두 논문을 보면서 약간의 비판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 한국 교회사> (2017)에서

민경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