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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890s

4월 24일의 두 사건

125년 전 4월 24일의 두 사건: 동학운동 녹두꽃이 떨어지고 불교 부흥의 계기가 마련되다

1. 새벽에 동학혁명의 우두머리 전봉전 장군을 처형

(“京城特報 四月 二十四日 特派員發,” <時事新報> 1895년 5월 7일.)

23일 오후 4시 경 사형 선고 후 24일 새벽 2시에 손화중, 최영창과 함께 교수형에 처했다. 법무협판 이재정의 판결-법무대신 서광범의 보고-국왕 고종의 윤허로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고등법원 판결은 이 협판과 장박 참의, 일본영사관 우치다 사다츠치(内田 定搥) 일등영사로 구성된 3인 판사들이 내렸다. 당시 교수형은 대개 동대문 밖 남벌원에서 실시했고, 처형된 자의 목은 3일간 서소문 밖에 효시했다. 그러나 전봉준의 경우는 효시하지 않았다. 이에 양반들은 “역적을 목 베어 조리돌리지 않았다”고 개화정부에 항의했다.

 그리피스 컬렉션, 러거스대학교, 2015년 새로 공개된 사진, 아래 사진과 동일하나 몇 초 간격이 있다.

[참고: 전봉준 사진]

일본의 <메사마시신문>에 동학당 효수 사진이 처음 실리고, 이사벨라 비숍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이 사진을 수록하면서 사진 속 수급의 주인공이 전봉준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수급의 실제 주인은 수원에서 활동하다가 잡혀 서울 동대문 옆 수구문 밖 남벌원에서 참수된 최재호와 안교선이다. 생전 전봉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호송 장면을 찍은 사진 단 한 장뿐이다.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텐신이 일본 영사인 우치다의 허락을 받아 1985년 3월 27일(양력) 일본영사관 구내에서 사진을 찍었고, 2개월이 지난 5월 10일 발매된 《사진화보》 제14권에 게재했다. 그러나 3월 12일자 <오사카매일신문>이 전봉준의 호송 기사를 내보내면서 ‘압송당하는 전봉준 장군’이라는 제목의 삽화를 함께 게재했는데, 이는 무라카미 텐신의 사진을 삽화로 그리고 다시 목판으로 만들어 찍은 것이다. 일본은 전봉준이 체포되자 그를 병원에서 치료하는 등 특별대우하며 심문했는데, 대원군과의 관계를 밝혀 대원군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끝까지 그 관계를 밝히지 않았다. 대원군이 밀사를 보낸 적은 있으나, 전봉준이 그와 협력하지는 않았다. (이이화, 『전봉준, 혁명의 기록-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2014), 231~232.)

2. 서울 성 안에 불교 승려 출입 허락

천민인 불교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는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1451년 문종 때 처음 시행되었으나 명종, 임란 후에 일시 해지되었지만, 1625년 인종이 다시 명하여 시행되었다. 270년 만에 해금되었다. 일본 일연종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청원으로 천시와 서러움의 표상이었던 승려 도성 출입금지가 풀렸다. 일본 불교는 강화도조약(1876)을 교두보로 정토진종 오타니파(大谷派)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이 1877년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한 이후 서울에 진출하였다. 청일전쟁 후 친일 내각이 들어서면서 일본 불승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서울 시내 일본인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었고, 한국인 승려도 서울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발전 1]

10월 8일 새벽 을미사변. 일본 영사관의 사주를 받은 낭인들이 경복궁에 쳐들어가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를 때, 민 왕비의 침소인 옥호루에 침입한 낭인 중에는 허리에 칼을 찬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도 끼어 있었다. 을미사변의 핵심세력은 <한성신보> 팀이었다.

[발전 2]

1902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가 건축되었다. 대한제국 정부 주도로 설립된 원흥사는 1902년 1월에 개당(開堂) 법회를 열었다. 국내의 사찰과 승려를 관리하고자 하는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1902년 4월 원흥사 안에 설치되었다. 1903년 9월에는 고종 황제의 위축전각(位築殿閣)과 명성황후의 원당(願堂)과 법당을 신축했다. 1904년 사사관리서가 폐지되면서 원흥사도 폐사될 위기에 놓였으나, 봉원사(奉元寺) 이보담(李寶潭), 화계사(華溪寺) 홍월초(洪月初) 스님이 중심이 된 불교연구회로 이관되었다. 1906년 원흥사에 명진학교가 세워졌는데, 현재 동국대학교의 출발이었다. 원흥사는 1910년까지 한국 불교의 중심 사찰 역할을 했다. 1908년 3월 불교계의 대표 52명이 원흥사에 모여 원종을 설립하니 근대 종단의 출발점이었다.[이후 창신학교로 바뀜]

 창신보통학교로 변한 원흥사

 보성학교운동장과 각흥사

[발전 3]

1910년 처음으로 사대문 안에 불교사찰인 원종(圓宗)의 각황사(覺皇寺)가 건립되었다. 동대문 원흥사에서 종무원 소속 불교당을 중부 사동에 건축하기로 내부에 청원하여 인허를 받고 3월에 공사를 시작했다. 전국 사찰이 이에 호응하여 2,000여 석의 백미 연조가 이루어졌다. (“잡보: 불교당 건축,”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8일.) 각황사 창건은 1909년 12월 전국 승려대표 150여 명이 원흥사에 모여 새로 설립한 원종설립 인가에 맞춰 한성부 안에 불교총합소를 설치하기로 결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사대문 안에 원종 사찰을 창건하는 것을 숙원사업으로 정했다. 각황사 터로 박동(薄洞)에 있는 옛 동녕위궁(東寧尉宮: 현재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근처, 보성학교 옆] 자리를 3천 원에 매입했으며, 10월 초에 건축을 마무리하고 1910년 10월 26일과 27일에 봉불식을 열었다. 이를 위해 강원도 각 사찰에서는 6,000원을 모아 보냈고,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각 사찰에서도 백미 1천 석을 불사금으로 내놓았다. 각황사를 짓기 위해 전국 사찰에서 모은 불사금이 백미 2천 석과 현금 8만 원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