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대/1970s

민족 복음화 대성회, 1977년

민족복음화성회준비위원회는 3년간 준비한 후 평양대부흥회 70주년인 1977년 광복절에 서울 여의도에서 77민족복음화대성회(고문 백낙준, 한경직, 대회장 김세진, 위원장 신현균)를 한국인만의 힘으로 개최했다. 대회 표어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가 보여주듯이, 민주화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복음전도를 목표로 하였으며, 외국인 강사가 주도한 앞의 두 대회와 달리 “한국인에 의한 자주적인” 부흥회로 신현균 목사가 주강사로 집회를 인도했다. 

이에 앞서 전국 300여 곳에 ‘77성회 지구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600여 명의 한국인 강사가 부흥회를 열고 복음화와 비상시국을 위해서 기도했다.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에 이어 1976년 말 당선된 카터 미국 대통령이 제시한 미군 철수 방안으로 인해 연초부터 전국에 ‘나라를 위한 특별기도회’와 ‘미군철수반대 궐기대회’가 이어지던 때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개신교는 보수 진보 모두 미군 철군 반대 집회를 했다. 민족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로 보았다. 보수는 시국대책위원회를 경성하고 3월 27일 서울 5.16광장과 지방에서 동시 집회로 철군반대기도회를 했고, NCC는 5월 22일 새문안교회에서, 통합측은 25일 영락교회에서 철군반대 기도회를 개최했다. 73년 빌리그레이엄 집회와 1974년 엑스폴로 집회 경험을 십분 살렸다.

라서 77 서울 대성회는 ‘애국적’ 집회로 인식되었고, 첫째 날 80만, 둘째 날 120만, 셋째 날 150만 등 연인원 650만 명이 참석했다. 밤에는 수십 만 명이 남아서 철야기도를 했다. 

한편 지역대회 때부터 기독교인 연예인들의 특별 출연이 이루어져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이는 74년 엑스플로 때 도입되어 인기를 끌었던 방법이었다. 인천의 경우 다음 광고지에서 보듯이 고은아, 유준, 구봉서, 윤복희, 이종용, 허림, 곽규석, 방은미 등이 출연했다.   

77년에 신현균 목사가 주 강사였으나, 또 한 명의 떠오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김홍도 목사였다. 교회 개척 5년만에 70명에서 4,000명 교회로 성장시킨 그는 다음과 같은 책을 내고 광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