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대/1970s

엑스플로 74 전도대회

김준곤과 조용기의 부상: 유신 체제 지지로 혜택

1974년 복음주의 교회들은 ‘민족 복음화’를 내세우고 ‘총동원 전도’ 방법을 논의한 반면, 에큐메니컬(NCC) 진영은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며 민주주의 국가를 염원했다. 7월 16일부터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1차 로잔대회에는 한국에서 조종남, 한철하, 조동진, 김옥길 등 65명이 참석했다. WCC 진영의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의 1973년 방콕대회가 통전적 구원(“온교회가 온복음을 온세계에”)과 상황화 개념을 제시하고 복음이 전파된 나라에서 외국선교사와 선교비를 감축하는 모라토리움을 주장하자, 복음주의 진영에서 활로를 모색한 대회였다.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가 초안한 로잔 언약에 명시된 선교 신학은 복음 전도의 우위성을 확인했으나 사회적 행동과 책임도 강조했다.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타종교와의 대화(4항), 통전적 선교 개념(6항), 토착교회의 자립심을 기르고 미개척지역으로 자원을 전환시키기 위한 모라토리움의 필요성 인정(9항)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국내 정세를 이유로 로잔 언약을 교계에 소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즉 1월 8일 박정희 정부가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고 4월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반정부 인사들과 기독교인들을 구속하고 탄압하는 한편, 7.4공동성명으로 남북관계가 급진전되었다가, 8월 15일 광복절 행사장에서 영부인 육영수 피살 사건이 발생해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유신 체제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대학생선교회(CCC, 김준곤 목사) 주최로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열린 엑스플로 74 대회는 “예수 혁명”과 “성령의 제3 폭발”을 주제로,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라는 표어 아래 세계 84개국에서 온 3,400여 명(일본에서 1,000명)을 비롯해 국내에서 온 32만 여 명이 합숙 전도 훈련을 받았다. 특히 청소년과 대학생 3만 명을 전도요원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목표였고, 이들이 좋아하는 복음성가를 적극 활용하여 ‘감성적 신앙 폭발’을 자극했다. 저녁에는 여의도 광장에서 전도 집회로 모여 매일 65만 이상, 연인원 655만 명이 세계대학생선교회 총재 빌 브라이트, 한경직, 김준곤, 하도리 아끼라(일본), 찬 두레이(싱가포르), 필립 탱(홍콩) 등의 설교를 듣고 복음화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철야 새벽기도회도 진행되었다. 

취사 문제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적극 협조하면서, 조용기 목사가 이 대회의 또 다른 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8월 17일에는 참석자 20만 명이 서울 거리에 나가 직접 전도하여 수 만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코미디언 곽규석은 사업 실패 기간에 성경을 읽고 새 힘을 얻고 재기한 후 엑스플로 전도대회에서 감격과 감사를 간증하였으며 <성서한국>에도 간증문을 실었다. 인기 가수 조영남의 회심과 신학공부를 위한 미국 유학 결정도 이 대회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CCC는 이때 전도에 사용한 4영리를 이후 전도의 도구로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이 대회에서 헌신한 이들이 전도에 적극 나서 교회 성장을 견인했다.  

그러나 73년 빌리 그레이엄 대회와 달리 엑스플로 74에는 탄압을 받던 에큐메니컬 진영이 참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CCC 집회가 유신 정권의 후원 아래 진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한국 교계는 물론 기독 학생 운동에서 보수-자유 양 진영이 서로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노선 분열이 가시화되었다. 대학생이 늘어나고 ‘학생의 힘’이 증가되던 때에 캠퍼스에서도 자유측은 기독학생회(KSCM) 등을 조직하여 사회참여로 나가고, 보수측은 CCC와 IVF 등 성경공부와 전도 중심의 단체를 만들었다. 후자는 선교 목표가 민족 복음화라고 밝힌 반면, 전자의 에큐메니컬 측은 보수 진영이 정치적으로 주요한 시점마다 엑스플로 ’74 같은 대회를 열어 국민들로 하여금 유신 정권의 죄악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종교 시장 측면에서 보면, 빌리 그레이엄의 단순 명료한 중생 중심 설교, 김준곤 목사(CCC),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연예인 등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권이 한국 기독교 시장을 선점하는 효과를 낳았다. 대중 중심, 청중 중심의 단순, 명확, 세련된 메시지가 한국 개신교의 브랜드가 되면서 마케팅에 성공하고 90년대 중반까지 급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