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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찬송,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좋은 교회 찬송이다.

최덕성 총장의 칼럼에 대한 반론 

2021226일자 최덕성의 찬송가 582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라는 칼럼/오피니언 글이 <크리스찬투데이>에 실렸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8328. 이 글은 비판적 반론이다.

이 찬송은 아래 이미지에서 보듯이, 김재준 작사(1965), 이동훈 작곡(1967)으로 현용 찬송가에는 나라 사랑이라는 주제 항에 들어가 있으며, 주제 아래에는 '교회'가 표시되어 있다. 가사 첫 구절을 가져온 찬송 제목 아래에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0:15)를 표기하여 복음 선교와 연결시키고 있다. 즉 텍스트 자체만 보면 한국인 작사 작곡의 순수 한국 교회 찬송이요, 고난의 나라와 교회를 복음과 선교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자는 희망에 찬 찬송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하나님, , 예수, 성령, 교회 등의 직접적인 기독교 용어가 등장하지 않고 비유적 단어만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이 노래가 불리는 1차적 삶의 정황이 교회와 기독교인의 모임이었지만, 동시에 60-70년대 민주화 운동 집회에서 비기독교인도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용한 찬송가 아래에는 기타 코드를 표시함으로써 그런 공개 대중 집회나 혼자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했다. 찬송가에는 주일 예배 시간에 사용하는 찬송만 수록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나 비기독교인들이 다양한 장소와 집회에서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송도 필요하다. 582장이 만들어진 역사적 상황과 그 의미, 신학--토착화신학, 세속화신학, 정치 신학--을 살펴봄으로써, 최덕성의 견해를 비판하고자 한다

1. 최덕성의 주장

(1) 문성모 교수의 평가 비판

최덕성은 문성모, “장공 김재준의 찬송시에 대한 신학적 이해,” <기독교사상> (2017. 3)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전개한다. 문성모의 글은 공개되어 있다. (http://www.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culture_new&wr_id=32&main_visual_page=gisang)

문성모는 이 찬송에 나타난 신학 사상을 한마디로 긍정을 향한 끝없는 변혁, 위를 향한 끝없는 순례로 본다. 민족교회는 김재준 신학 사상의 두 축이다. 이 둘은 하나이며, 영원한 순례를 위한 동반자이다. 순례1) 빛에서 어둠으로: 역사의 전환, 신앙의 전환, 신학의 전환이라는 세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2) 빛에서 삶으로: 민족, 교회, 생명을 위한 삶으로의 순례이며, 3) 땅의 삶에서 하늘 삶으로: 교회는 나무와 같아서 옥토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가지가 자라고, 잎과 열매가 열려 만인을 살리는 것으로 노래한다. 4) 오늘의 삶에서 새누리 삶으로의 순례이며, 5) 또 다른 새 삶을 위한 순교적 죽음으로의 순례이며, 그 순례의 길은 바로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암시한다. 즉 사용하는 용어와 1-3절로 나아가는 가사의 내용이 순례와 변혁을 지향하는데,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다시 씨앗으로 떨어져 죽음으로써 새 생명이 자라듯이, 교회와 민족도 그런 순례와 변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최덕성은 이 찬송 시가 찬송다운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아니며, 회중 찬송으로 적합하지 않고, 이 찬송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평가하면서, 문성모의 논증과 추리는 범주 착각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곧 “특정인[김재준]의 훌륭한 삶과 사상이 그 사람이 남긴 작품의 탁월성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둘은 별개의 사안이다. 중요한 것은 위 '찬송 시'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라고 지적한다.

(2) 최덕성 총장의 평가와 주장

이 가사는 찬송이나 찬송가다운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hymn)’이 아니다. 신앙고백과 기도를 담은 찬송가(hymnal songs)’도 아니다. 나라 사랑 담은 민중 예찬가일 뿐이다. 교회, 신앙실천, 선교의 책임 등을 노래하는 복음송도 아니다. 애국가 정도의 신앙 고백도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찬송가>에 포함되거나 회중찬송으로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다. 김재준의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일제 말기 한국교회들이 매 주일 예배 중에 불렀던 우미유가바(うみゆかば)’를 떠올리게 한다. 1937년 작곡된 일제의 국민계몽용 애국송이라는 일본 가곡이다. ‘천황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겠다는 노래이다.“바다에 나간다면 나의 시체는 바다에 띄우고, 산에 나간다면 초원에 버린다. 아무튼 천황 가까이에서 죽는다. 뒤는 돌아보지 않겠다.”

2. 나의 주장

(1) 최덕성의 범주착각의 오류

친일 문제 전문가이자 보수적인 고신 출신의 최덕성에게는김재준의 삶에서, 1960년대 이후의 삶보다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하고 훼절한 역사가 더 중요한 듯하다. 그래서 일제말의 우미유가바를 들고 와서 김재준의 가사의 배경에 1938-45년의 전쟁 시대가 있는 것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를 조작한다. 삶과 가사를 분리해야 한다고 범주를 강조하면서도 그가 역사가이므로 어쩔 수 없이 김재준의 삶을 거론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찬송가 582장 가사 어디에도 우미유가바(うみゆかば)’와 같이 전쟁과 폭력과 살육을 지지하면서 국가에 맹목적 충성을 노래하는 제국주의, 군사주의적 요소가 없다. 독재를 항거한 19604. 19의거 때 분출한 한국교회의 기독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담은 노래이다. 민족의 생명, 만민과 역사의 생명을 노래하면서 인류애와 평화를 지향하는 찬송이다. 어찌 태평양전쟁 때 천황에게 충성하면서 전쟁을 지지하고 생명과 인권을 무시한 폭력적 정신이나 제국 신학이 있다는 말인가? 최덕성은 의도적으로 시대적 배경을 어긋나게 연결하면서 억지 해석을 하는 범주 착각, 시대 착오의 이중 오류를 범하고 있다.

3절을 쓴 문익환에 대해서도 “1989년 대한민국 실정법을 어기고 방북해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라고 굳이 언급하는 것을 보면 최덕성의 정치적 노선도 짐작할 수 있다. 문익환은 1980년대 후반에 이 가사를 쓴 것이 아니라,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한 1976년 명동 3.1구국선언 사건으로 수감되어 있을 때, 민주주의와 인권을 열망하면서 이 시를 썼고, 그것이 나중에 찬송가 3절로 들어갔다

따라서 최덕성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 추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두 작사자의 삶의 경험과 가사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비판한 바로 그 범주 착각의 오류를 스스로 범하고 있다.  

그 결과 최덕성은 가사에서 추론하거나 볼 수 없는 민중 예찬가라는 무리한 평가를 덮어 씌운다. 작사가들의 삶과 가사를 별개의 사안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그 곡이 찬송가에 실릴 때 교회나라의 주제 항목에 들어가는 찬송이었지, 민중과는 연관이 없는 찬송이었다. 어떤 근거로, 어떤 가사에서 민중 예찬을 한다고 보았는지 궁금하다. 문성모는 교회와 나라의 주제 하에 순례와 변혁의 모티브를 논한다. 과연 최덕성은 어디서 민중 예찬을 보았는가

최덕성이 주장하는 작사가의 삶과 가사를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 또한 오류이다. 어찌 삶의 정황에서 나온 신앙고백적 가사를 작사가의 삶과 인생 역정과 분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 수 많은 성경 내용과 찬송에 대해서 왜 역사적 연구를 하며, 찬송가 해설서에 작사자의 경험과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가? 삶과 분리된 가사야 말로 말뿐인 가사가 되어 공허한 노래가 될 것이다.    

(2) 작사의 시대적 배경과 삶의 정황을 왜곡하거나 생략한 오류

교회사가인 최덕성이 이 찬송에 대한 작사 배경이나 작사자의 의도, 그 찬송이 처음 불린 정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은 퍽 이상하다. 이 노래는 본래 1965년에 신축된 성남교회(당시 예배당 명칭은 '만우 송창근 목사 기념예배당‘)에서 기독교장로회 제50회 총회에서 기념가로 처음 불렸다. 당시 총회장이며 한신대학장인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 목사가 작사했다. 곧 기장이라는 교단의 희년(1953년에 예장과 분열한 후에 기장도 1912년 제1회 총회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이때 50회 총회로 했는데, 이런 해석과 사관은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기념시요 기념 찬송이었다.

1967년 이동훈의 곡이 붙어 다음과 같이 개편 찬송가(1967)212장으로 들어갔다. 개편찬송가는 장로회(예장 통합, 기장), 감리회, 성결교회의 대표들이 한국찬송가위원회를 결성하고 만든 연합 찬송가였다. 그 때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이 들어가 찬송을 수록한다는 원칙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이 찬송가를 넣었는데, 제목은 가사 첫 줄을 딴 것이 아닌 교회의 노래였다. 주제도 "교회와 선교"였고, 찬송 아래 표시한 관련 성경구절도 롬 10장 5절이라 교회와 선교의 노래임을 밝혔다. 

가사를 보면 60대 김재준 목사가 일제시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다음 몇 가지 한계는 있다. 1) 용어에 식민주의가 묻어 나온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서양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오리엔탈리즘의 색안경으로 한국을 미개국, 정체국으로 보았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찬란한 아침의 나라"로 수정하면 좋겠다. (사실 나는 그렇게 고쳐서 부른다.) 2) "옥토의 뿌리는 깊어"는 일본어 어투이다. 현용 582장처럼 "옥토에 뿌리는 깊어"가 바른 어법이다. 또 "하늘에 줄기 가지 솟을 때"도 "하늘로..."로 수정되었다.  

토착화 신학과 함께 1960년대에는 세속화 신학이 논의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가사에는 기독교적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에스더서>가 여호와나 주가 나오지 않아도 엄연히 구약의 한 책으로 애독되었듯이, 이 찬송에는 직접적인 기독교적 용어가 없기 때문에 비기독교인들도 민주화 집회 때 아무 거리낌 없이 부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70년대 감옥에서 지은 문익환의 3절이 들어가서 하나의 노래로 통합되어도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완성도가 높은 찬송이 되었다.

이후 제목이 바뀌고 주제항목이 바뀌어도 대개 나라와 교회를 위한 절기 노래로 애송되었다. 이런 1960년대 역사적 배경과 상황민주주의, 인권, 교회와 교단 기념, 한국적 신앙고백과 지기 신학의 의미을 무시하고, 1940년대 초나 1980년대 후반을 이 노래의 상황으로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3) 찬송가에 수록되는 찬송에 대한 편협하고 배타적인 견해

최덕성은 찬송가에 수록되는 신앙고백적 노래와 (주일) 예배 때 많이 부르게 되는 예배용 찬송을 혼동하는 듯하다. 모든 찬송가의 노래가 예배 시간에 불러지는 것은 아니다. 장례식 찬송을 주일예배 시간에 부르지 않듯이, 찬송가 안에는 다양한 경우에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수록하고 있다. 1장부터 약 100장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들과 달리 후반부로 가면 특정 모임에 부를 수 있는 찬송들이 많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3.절, 4.19기념식이나 광복절, 건국절, 교회 설립일, 민주화운동 기념일, 선교대회 등에서 부를 수 있고, 혼자 나라를 생각하면서 부를 수도 있는 찬송이다.

참고로 한국 교회는 남궁억, "일하러 가세," <신정 찬송가> (1931), 219장을 열심히 불렀다. 3.1 운동 후 한국 사회를 변혁해 나간 기독교인들의 노동/디아코니아 찬송이다. 이제 분단이 되었으니, 삼천리가 아니라, 이런 찬송을 찬송가에서 없애야 할까?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 곧 금일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4) 찬송가는 성경과 달리 한 시대, 한 민족, 심지어 한 교단에서 불리다가 사라질 수 있다. 

그런 찬송의 시대성 때문에 그 찬송이 찬송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최덕성은 찬송의 성격을 잘 모르는 듯하다. 시편을 떠나 시공을 초월하는 찬송은 없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인종마다 언어와 교파에 따라 찬송은 다를 수 있고, 달라야 한다. 그가 칼럼에서 예를 들었듯이, 금주가가 필요하던 1920-50년대에는 금주가를 찬송가에 넣을 일이다. 

지금은 다수가 포도주를 마시는 시대이므로, 고신 교단에서도 와인 술 잔을 처다보지도 말고 그 잔을 만지지도 말라는 가사로 노래를 부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어떤 찬송이 한 시대에 불리다가 더 이상 불리지 않는 이유가 찬송이 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찬송이 그 운명에 있다. 즉 찬송은 유행가처럼 유행은 타지 않지만, 한때 불리다가 안 불릴 수도 있는 특성을 가진다. 김재준 작사의 "어둔 밤 마음에 잠겨"가 30년 후에 불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을 부르지 않을 경우, 그것이 찬송가로서 부적당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부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5) 가사뿐만 아니라 곡조도 한국적 리듬이나 민요를 사용할 수 있다.

굳이 루터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개신교 찬송은 개혁주의가 가르치는 일반 은총의 입장에서 민요 가락도 찬송가에 이용할 수 있다. 한국인의 전통 음계인 5음계에 맞추어 작곡할 수도 있다. 뱃사공의 노래나 농민들의 노동 민요나, 누구나 아는 아리랑 곡조에 기독교적 가사를 붙여서 찬송을 만들 수도 있다.

 1990년 미국 연합장로교회(PCUSA)서 발간한 찬송가에는 아리랑 곡조에 “Christ, You Are the Fullness”라는 가사가 붙여져 수록되어 있다작사자는 미시간주 칼뱅칼리지 음악교수인 버트 폴만(Polman)으로 그는 아리랑의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 작사해서 찬송가에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증가하는 아시아 기독교인특히 한인 기독교인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6) 역사적 사실의 왜곡과 무지

최덕성의 글에는 왜 김재준의 찬송이 찬송이 아닌지에 대한 근거나 이유는 거의 말하지 않고, 위에서 (2)번에서 말한대로,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 지면을 채우고 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까지 가져와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가미가제 자살특공대원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몰고 진주만을 공격했다." 진주만 공격 때에는 가미가제 자살특공대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가진 좁은 신학적 입장에서 어떤 찬송을 비판적으로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찬송가로서는 부적합하다거나, 내용에도 없는 범주 착각에 의해 민중 예찬가로 왜곡 평가하는 무례한 일은 신학자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이다. 며칠 후 삼일절을 앞두고, 한국 교회가 신앙고백적으로 경건하게 불러온 애국, 애교회 찬송을 느닷없이 왜곡 평가절하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글이라, 굳이 이런 반론을 쓴다. 다른 사람의 신앙 고백적, 선교적 언어를 함부로 예단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