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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60s

60년대 분신자살(소신공양)

1. 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 틱꽝득, 1897년 ~ 1963년 6월 11일): 베트남의 승려로 월남(남베트남) 정부의 불교 탄압에 항의해 소신공양으로 생을 마감했다. 남베트남 사회의 공분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종식을 불러와 베트남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다른 불승들도 그를 따라 월남 정부의 불교 탄압을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는데, 억눌린 민중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월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1967년에는 여승도 분신에 참여했다. 

1963년 6월 11일 틱꽝득의 소신 공양 https://ko.wikipedia.org/wiki/%ED%8B%B1%EA%BD%9D%EB%93%9D

불교에는 전통적으로 분신(소신)을 통해 부처에게 공양하는 소신공양이 있었다. 《묘법연화경》에서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 앞에서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던 데서 유래한다. 경전은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와 나라를 위한 자기 희생의 한 방법이었다.

2. Norman Morris: 1965년 미국 볼티모어 퀘이커 교도 모리스(December 29, 1933 – November 2, 1965)가 31세의 나이로 미국의 베트남전쟁 참전에 항의하고분신자살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에리 출신으로 1956년 우스터대학을 졸업했다. 1965년 11월 2일 워싱턴 국방장관 맥마라 (Secretary of Defense Robert McNamara)의 사무실 밑에서 온 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했다. 한국에서도 이 사실을 바로 보도했다.

 

평화주의자였던 그와 아내 앤(Anne)은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적극 가담하며 세금 납부 거부운동도 벌이고, 신문에 기고하고,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열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1남 2녀의 아버지였던 31세의 그는 아내가 장남 벤(당시 6세)과 딸 크리스티나(5세)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러 간 사이 막내 에밀리(1세)를 데리고, 40마일을 달려 당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집무실에서 10m 남짓 거리에서 분신을 감행했다. 분신 직전에 그는 에밀리를 낯선 행인에게 맡겼으므로 아이는 무사했다. 일주일 뒤 로저 앨런 라포르테(Roger Allen LaPorte)라는 청년도 뉴욕 유엔빌딩 앞에서 분신했다. 그들의 분신 이후 반전운동이 격화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0291026068024?did=NA&dtype=&dtypecode=)

기독교에서는 불교와 같은 분신 공양의 전통은 없다. 모리스의 행동은 월남 승려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을 희생하는 방안으로 분신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3. 허직( 許埴, -1965. 8. 1): 한국에서는 모리스의 분신 이전 1965년 7월 21일 국회의사당 앞 한일협정 반대 데모 과정에서 허직 씨가 분신으로 항의했다. 그는 신문사에 미리 보낸 유서에서 자신은 추풍회 중앙당 통계부장이며, 지금까지 한일협정을 막지 못해 죄송하며, 자신의 희생이 한일협정 비준을 막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는  63세의 나이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한 지 11일만인  8월 1일 사망했다. 

1963-65년 신문에는 10여 건의 분신자살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가정 불화, 가난 비관, 연애 비관 등으로 자살할 때 분신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허직 씨의 분신은 달랐다. 아마도 베트남 승려들의 소신공양에 영향을 받아 항의 분신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이런 정치적 항의성 분신 자살이 60년대에 한 건, 70년대에 한 건이 있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1991년까지 학생 운동권과 노동조합원의 반정부 데모에서 수십 명이 분신자살한 것과 대조된다. 60년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는 주체사상 이념의 영향으로 분신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