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882년 임오군란 후 이용익은 하루에 500리를 걷는다(달린다)는 소문을 냈다. 500리면 전주에서 서울까지 하루에 달린다는 말인다. 오늘날 그가 살아 있었다면 마라톤 세계 챔피언은 따 놓은 당상이다. 그런 황금발을 가진 이용익은 고종의 눈에 들어, 당시 민왕비가 피신해 있는 충주까지 서찰을 보내게 했다. (그 전에 민비가 실험 삼아 이용익을 서울에서 전주까지 가게 했는데 (혹은 그 반대) 12시간 만에 500리를 주파했다는 말도 있다.) 고종이 이용익을 시켜 민비에게 서찰을 보냈다는 말은 영문 독립신문 <The Independent> (Aug. 6, 1898)에 나오는 말이니 좀더 신빙성이 있다. 아무튼 1880년대에는 잘 달리는 준족만 가져도 출세할 수 있었다. (1890년대에 가면 자전거가 나오고, 1900년대에는 기차가 나와서 준족이 무색해 졌다.)
2. 각설하고, 1리는 어른 걸름으로 360보, 10리는 3,600보이다. 장정이라도 그 정도 걸으면 쉬어야 하는 거리를 말한다. 인간 중심의 거리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 한 보(步)는 지금으로 치면 몇 cm일까? 실제 한 보는 지금 걸음으로 두 걸음이다. 그 두 걸음의 보가 360보가 되면 1리, 3,600보가 10리였다.
3.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돈화문을 기점으로 동대문까지는 1489보이고, 종루에서 동대문까지는 1408보라고 적었다. 이 거리를 지금 재면 대략 돈화문에서 동대문까지는 2,390m이고, 종루에서 동대문까지는 2,370m이다. 이를 역으로 계산하면 2,390m÷1,489보=1.6m이므로 1보의 길이가 1.6m이다. 이를 10리(조선시대 10리는 3,600보)로 환산하면 1.6m×3,600보=5.7㎞이다.
한편 종루에서 동대문까지는 약 2,370m(실제의 거리)인데 이를 1,408보(<대동지지>에 기록된 길이)로 나누면 한 보가 1.68m가 된다. 따라서 10리의 거리는 1.68m(1보의 길이) × 3,600보(조선시대 10리 보수) = 6.04㎞가 된다.
이 두 경우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10리는 실제로 5.7㎞나 6.04㎞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법은 19세기 말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부터 사용했고, 조선시대에는 우리 나라 고유의 도량형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10리와 조선시대의 10리는 분명히 그 거리가 달랐다. 시골길의 10리는 아직도 조선시대의 풍습이 남아 4.7㎞나 5.7㎞, 또는 6.04㎞인 것이다. 지구의 둘레는 4만㎞인데, 이를 360도로 나누면 1도는 111.1㎞가 된다. 이를 조선시대 위도 1도를 200리라고 했으므로, 111.1㎞를 200리로 나누면 5.5㎞가 된다. 이와 같이 계산해도 조선시대 10리는 5.5㎞이다. (이상태, <조선역사 바로 잡기>, p. 225에서 요약 인용.)
4. Horace Newton Allen이 재한 미국인들을 위해 안내서로 발간한 Information for the benefit of American residents in Korea (Seoul: U.S. Legation and Consulate General, 1899), p. 2에는 다음과 같이 미국인이 한국 개항장 도시(부산, 원산, 제물포, 서울)와 주변 10리 안에서만 부동산을 구매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10리는 3.5mile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조약 상의 내용이고, 부동산 구입에 대한 규정이므로 정확한 내용이다. 이를 km로 환산하면 1마일(=5,800 foot =1.609344 kilometers) x 3.5 = 5.6327 km가 되어, 한 보는 (5,632.7/3,600=1.56m), 10리는 5.63km가 된다.
이는 위에서 본 첫 경우인 돈화문-동대문 거리에 기반한 10리인 5.7km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상태는 차를 타고 가면서 거리를 재었기 때문에 정확한 거리는 아니므로, 알렌이 말한 3.5마일을 10리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시대 한 보를 1.56m, 10리를 3.5miles(약 5.63km)로 확정할 수 있다.
결론: 10리 = 3.5 마일 = 5.6327 km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는 10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라고 한다. 10리를 걸으면 쉬어야 하는데, 그 전에 발이 아파서 쉬다가 보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바램이었을까?
장돌뱅이들은 아침 해가 돋기 전에 먼 길을 떠났다. 선교사들도 전도여행 때 일찍 나섰다. 해가 돋으면 땀이 나기 때문이다. 10리마다 쉬면서 땀을 훔치고 물을 마신 후, 40리 길을 걸으면 점심을 먹었다. 10리마다 마을이 나타나고, 40리마다 주막이나 여관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급하게 무리를 하면 하루 80리나 100리를 갔다. 곧 45-56km를 나귀에 짐을 싣고 걸을 수 있었다.
참고) 서울에서 여주까지가 200리였으니, 이틀 거리였다. 평양에서 안주 사이는 180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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