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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평양과 기독교

[파친코 5부까지] 4 역사의 중요성

어머니의 힘, 한국 민중의 정과 한이 녹아든 한국사와 한국인 이민사

 
선자 어머니는 쌀가게에 가서 쌀 두 홉을 산다. 시집간 딸이 곧 일본에 가야 하므로, 가기 전에 우리 땅에서 난 쌀로 지은 밥을 한 번 맥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난한 과부 엄마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몰래 쌀 두 홉을 산다. 신랑 이삭과 딸 선자, 각 한 홉씩, 두 공기 밥이다.
 
쌀가게 할아버지는 두 홉 대신 세 홉을 준다. 나머지 한 홉은 선자 어머니(김양진)의 몫이다. "이거라도 먹고 설움이라도 조금 샘키라이." 아이 셋을 잃은 후 얻은 외동딸을, 잘 모르는 남자와 결혼시켜 낯선 이국 땅으로 보내야 하는 엄마의 심정을 아는 할아버지의 배려였다.
 
흰 쌀밥 한 그릇. 그곳에 어머니가 선자를 키워온 20여 년의 사랑과 이별의 눈물이 담겨 있다. 그 쌀밥 맛은 어머니의 인생이기에 선자는 평생 그 맛과 장면을 기억한다.

 

 
선자는 8개월 된 뱃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평양에서 온 착한 남자 이삭과 혼인하고 그를 따라 일본 오사카 행 배에 오른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는 엄마다. 아버지(김훈)의 소원을 따라 선자는 훨훨 날아 부산을 떠난다.
 

고한수는 백이삭을 비아냥 거린다. 구질구질한 과거에 매여 살지 말고 새 양복으로 첫 인상을 좋게 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백이삭은 역사야 말로 중요하다며, 3.1운동으로 죽은 형의 옷을 수선하여 자신이 입고, 자신이 입지 못하면 태어날 아들(실제로는 고한수의 아들)에게 입힐 것이라고 말한다. 물려 입는 옷, 곧 세대간 전승과 역사적 연속성이야 말로 이민자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하다. 역사보다 현실을 택한 고한수는 결국 아들 노아를 통해 역사를 계승하지 못한다. 노아는 자신을 도와준 한수가 아니라 이삭을 친아버지로 알고, 매년 기일에 이삭의 무덤을 찾는다. 이삭의 아들 모세는 (아버지의 양복을 입고) 파친코 사업으로 성공한다. 생존의 1세대에서 번영의 2세대를 이룬다.
 
연락선 덕수환(도쿠주마루)에는 시모노세키 건너 북구주(키아쿠슈) 치쿠호 광산으로 일하러 가는 남자들로 가득하다. 배 3등칸에서처럼 그들은 광산에서 바퀴벌레처럼 살게 된다. 일등석 일본인들을 위한 만찬에서 우아하게 가곡을 부르던 한국인 여자 가수는 갑자기 선자와 광부들을 위해 <춘향가> "갈까부다 임과 함께 갈까부다"를 구성지게 부른다. 선자와 광부와 재일교포 1세들의 한(恨)을 대변하는 애간장을 끊는 판소리 한 구절이다. 드라마에서는 집을 팔지 않는 고집센 할머니가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는 장면과 오버랩시킨다.
 
 
여가수는 자살을 하고, 계약은 파기된다. 가수는 일본에서 살아온 자신의 과거 역사를 기억하고 항의의 수단으로 배를 갈라 자살한다. 집 주인 할머니는 그 배를 타고 광산에서 고생하며 살다간 아버지를 기억하고 , 그 역사를 잊은 자녀들에게 항의하는 수단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거부한다. 그때 솔로몬은 성공의 상징 넥타이와 양복을 벗어던지며 자신이 조선인인 것을 깨닫는다. 비오는 거리에서 밴드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피 속에 숨어 있던 한이 솟아 터진 것이다. 그러나 3세는 아직 세대를 이을 아내를 찾지 못한다. 3세의 한계다.
 
이삭과 선자는 오사카 요셉/경희의 집에 도착한다. 경희는 정갈하게 쌀밥 상을 차려 친절하게 대접한다. 밥이 정이다. 가족이다. 살아갈 힘이다.
 
 
경희가 죽은 후 선자는 부산에 와서 아버지 묘를 찾는다. 복희 언니를 만나 고생한 역사를 듣고, 아버지 산소를 찾아 절을 한다. 선자는 돌고 돌아 원점인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역사는 흘렀다. 역사가 자신과 만주에 위안부로 팔려간 복희와 동희를 돌보지 않았지만, 민중이 역사를 끌어 안고 살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라가 민중을 버렸고, 비록 동희와 같이 꿈만 꾸는 민중은 스러졌으나, 현실을 안고 견딘 민중이 나라를 안고 세계 사방으로 흩어졌고, 고향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복희도 선자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피 속에 살아 흐르다가 맺히는 한이 터져 계약은 파기된다. 인종차별을 받으며 설움을 삼킨 젋은 여가수의 할복(하라키리)으로 부유한 일본인들의 저녁 만찬은 엉망이 된다. 잊을 수 없다. 한과 차별과 고난의 역사를 노래로 팔고, 돈으로 팔 수는 없다. 기억해야 하고, 알려야 하고, 나만이라도 지켜야 한다.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민중의 노래(한)요, 밥(정)이다. 노래와 춤과 밥이 우리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