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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20s

김구의 아내 최준례의 무덤, 1924년

김구 선생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오른쪽이 맏아들 김인, 둘째 아들 김신(왼쪽)과 함께 아내 최준례 여사 무덤을 찾았다. 한글학자 김두봉이 한글로 묘비명을 썼다.(백범기념관 제공). [출처 1]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내용을 풀이하려면 자음 순서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해서 이해하면 된다. 즉, 'ㄹ'은 아라비아 숫자로 하면 ㄱ-ㄴ-ㄷ에 이어 네 번째이니 '4'를 말한다. 최 여사의 출생일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며, 사망일은 '대한민국 6년', 즉 1924년 1월 1일이다. 김구는 대한민국이 1919년 건국되었으므로 그런 연호를 사용했다.

 다음은 블로그 “보림재”에서 퍼온 글이다. (출처 2)

하루는 신천 사평동(謝平洞) 예수교회의 우두머리인 양성칙(梁聖則)이 그 교회 여학생 최준례(崔遵禮)를 소개하면서 그녀와 결혼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최준례는 그 동네에 거주하는 의사 신창희(申昌熙)의 처제였으며, 준례의 모친 김(金)씨는 경성에서 나서 자랐는데 젊어서 과부가 되어 두 딸을 기르며 예수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신창희는 제중원(濟衆院) 의과생으로 있다가 준례 언니와 결혼한 후 생업을 위해 처가식구들을 데리고 신천 사평동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습니다.

교회 다니던 18세 최준례를 소개받다

준례의 모친 김씨는 작은딸 준례를 이웃 동네 청년 강성모(姜聖謨)에게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준례가 장성한 후 모친의 명을 따르지 않은 채 강성모와의 결혼을 거부하면서 이 일이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태가 커지자 선교사 헌트, 쿤스 등이 나서서 준례에게 강성모와 결혼할 것을 권하였으나 준례는 자신의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서 결혼하겟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양성칙이 백범에게 준례와의 결혼을 권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범은 이런 준례에 대해 지극한 동정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준례의 나이 18세 였는데, 백범은 조혼(早婚)으로 인한 폐해를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는 즉시 사평동으로 달려갔습니다. 이후 상황을 <백범일지>를 통해 살펴보면,

“사평동에 가서 준례를 만나본 후 혼약이 성립되게 되자 강성모 측에서 선교사에게 고발했다. 교회에서 나에게 그만두도록 권고하였고 친구 중에서 만류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 준례는 은율읍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정신학교의 오기]에 유학 보냈다. 처음에는 교회의 금지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責罰)을 선언하였으나, 끝내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선교사 쿤스가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도 해제하였다.”

네 번만에 겨우 결혼에 골인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31세 때였고, 준례는 그보다 13세 연하인 18세였습니다. 결혼식은 그해(1906년) 12월에 치렀습니다. 장남 인(仁)이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인 1918년 11월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 사이에 세 딸아이가 태어났다가 모두 어린나이에 죽었습니다. 이름과 출생일자조차 알려지지 않은 첫째딸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둘째딸(화경)은 다섯 살 때, 그리고 1916년에 태어난 셋째딸(은경)은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둘째딸 화경은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기 직전에 죽었는데, 죽기 전에 ‘나 죽었다고 감옥에 계신 아버님께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이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 상하시겠소.’라고 했다는 겁니다.

노모와 아내의 힘든 나날...세 딸도 모두 잃어

세 딸아이를 어린 나이에 잃은 것 말고도 이 시기 그들 내외는 힘든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우선 가장인 그가 이른바 ‘안악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형(이후 7년->5년형으로 감형됨)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습니다. 1915년 8월 가출옥으로 풀려나기까지 4년 반 가량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도 그지만 이 기간 밖에서 옥바라지를 한 모친과 집안일을 챙긴 아내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는 먹고살기 위해 둘째 화경이를 모친에게 맡기고 매일 일제 총독부 토지국(土地局) 산하 책 만드는 공장에 나가 노동을 했으며, 어느 서양여자가 아내에게 학비도 대주고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아이 때문에 그런 좋은 제안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 서로 의지하다보니 고부간에 갈등은커녕 ‘동지’가 돼버렸습니다. <백범일지>에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요, 그들 부부간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 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아내의 말에 반대하면, 어머님이 만장의 기염으로 호령하신다. “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행은, 나는 고사하고 너의 친구들이 감동하였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이런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내외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늘 지기만 하였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새 생명은 또 태어났습니다. 3.1만세의거가 일어나기 불과 4개월 전인 1918년 11월 장남 인(仁)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핏덩이 아들을 뒤로한 채 중국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 해 9월 상해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취임한 그는 이듬해(1920년) 8월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오면서 부자 상봉이 이뤄졌습니다. 다시 2년 뒤인 1922년 모친 곽낙원 여사도 상해로 건너와 모처럼 네 가족이 한 지붕 밑에 모였습니다. 그해 둘째 신(信)이 태어났고, 9월에는 도산 안창호의 뒤를 이어 그가 임정 내무총장에 올랐습니다. 그의 전 생애를 돌이켜볼 때 이 시기가 그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는데, 그 역시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고 <백범일지>에 쓴 바 있습니다.

계단에서 구른 아내, 폐렴까지 겹쳐 끝내 사망

그러나 그의 이런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고락을 같이해온 아내에게 큰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당시 그들의 숙소는 영경방(永慶方) 10호 2층였는데, 둘째 신(信)을 해산하고 몸조리를 하던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친 것입니다. 아내가 계단에서 구른 것은 시어머니인 곽 여사가 해산한 며느리 산후조리를 위해 세숫물을 떠다놓는 것을 황송하게 생각하여 손수 물을 길러 가다가 계단에서 실족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폐렴까지 겹쳐 1년 넘게 고생하다가 상해 보륭의원(寶隆醫院)에서 진찰을 받고 서양 시설을 갖춘 홍구(虹口) 폐병원에 격리,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보륭병원에서 아내와 작별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홍구 폐병원은 프랑스 조계(租界) 밖에 있었고, 일경들이 그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자동이 엄마’로 불리던 여성 독립투사 정정화(1900∼1991) 여사였습니다. 정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임종하기 전에 남편인 백범을 부르려고 하자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올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 여사의 연락을 받고 시어머니 곽 여사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뒤였습니다.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음에도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유해는 동지들이 의연금을 추렴해 성대히 장례를 치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습니다. 장례식은 1924년 1월 4일 오후 2시 프랑스 조계 내 숭산로 경찰서 뒤 공동묘지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습니다. 아내 최준례의 나이 그 때 서른 여섯, 그와 혼인한 지 18년째였습니다. 

사진과 글 출처:

1.  https://www.facebook.com/designersparty/photos/a.1189666357743912.1073741994.345549275488962/1123764157667466/?type=3&theater 

2. http://blog.ohmynews.com/jeongwh59/tag/%EB%B0%B1%EB%B2%94%20%EA%B9%80%EA%B5%AC%20%EC%95%84%EB%82%B4%20%EC%B5%9C%EC%A4%80%EB%A1%80 

다음은 19년 후 1943년 김구와 두 아들의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