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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880s

1884 고종의 선교 윤허가 감리교회 한국 선교 기점인가?

국민일보 2024.10.8일자에 다음 기사가 있어 감리교회가 1884년 고종의 선교 윤허를 감리교회 140주년 기점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 7월 초 고종이 선교 학교와 병원을 하도록 구두로 윤허한 것을 한국 감리교회 선교의 시작 시점으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매클레이는 주재 선교사가 아니라 방문 선교사였으며, 최초 방문 선교사도 아니었다. [1883년 11월~12월 제물포와 서울을 6주간 방문하고 성경을 반포한 다우스웨이트(Arthur William Douthwaite)의 노력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주장한 보고서를 발행했다.] 1934년 양주삼과 감리교회가 매클레이를 첫 선교사로 본 것은 장로교회에 대한 열등감[최초 선교의 자리를 빼앗긴 것과 거의 동시기에 선교를 시작했으나 1930년대에 장로교회가 8배나 더 성장한 것]에서 나온 자위적 억지였다. 아직도 이것을 기념한다니 그 역사의식이 의심스럽다. 김옥균이 주선한그 구두 약속은 12월 갑신정변으로 무효가 되었다. [참고, 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한국교회사>, 4장에서 상론.]
 
따라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북장로회는 별도의 통로를 통해 한국 선교를 시작했고 한국 선교사를 임명했다. 매클레이 한국 방문 이전에 이미 북장로회는 중국의 헌터와 리드의 한국 파송 요청을 거절한 후, 1884년 4월에[매클레이 방한 전에] 한국에 파송할 첫 선교사로 헤론 의사를 임명했다. 이어 1884년 6월 8일자 편지로 한국행을 요청한 상하이 주재 알렌(Horace N. Allen) 의사의 서울 전임을 전보로 허락했다. 즉 매클레이가 서울에 와서 고종의 허락을 받기 약 한 달 전에 알렌은 그런 요청을 했다. 이어서 7월 말에 언더우드를 임명했고, 9월 8일 선교부 실행위원회는 한국 선교회 설립을 승인했다.
 
고종의 미국 기독교에 대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알렌이 서울에 도착한 1884년 9월의 상황은 공식적으로 “선교사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Our First Letter from Korea," Foreign Missionary (December 1884): 303. 알렌이 1884년 10월 1일 서울에서 쓴 편지 전문이 실려 있다.]
 
매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전달받은 고종의 선교 ‘윤허’는 구두 약속이었으므로, 문서로 작성된 공식적인 효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김옥균을 통한 고종의 윤허는 갑신정변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므로 푸트 공사는 알렌을 조선 정부에 미국공사관 의사로 소개했고, 정부는 서양 의사가 필요한 현실을 고려하여 이를 타협책으로 묵인했다.
매클레이가 첫 선교사 알렌이나 언더우드나 헤론을 부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감리교회 측에서는 알렌을 선교사로 보지 않는 억지 해석을 한다.
 
가우처와 민영익 보빙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1882년부터 한국 선교는 선교지도자들 가운데 주요 의제였다. 가우처-매클레이-김옥균 라인은 여러 한국 선교 개시를 위한 노력 중의 하나였고, 첫 시도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