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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승만

이승만 미화 지나치면 독이다

[지나친 역사 미화는 독이다]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이 호 목사)가 며칠 전 뉴욕 프라미스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승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를 “세기적인 위대한 전도자”로 칭송했다. 

“1899년 1월, 추운 겨울날 조선의 중죄수만 가두는 한성 감옥에서 이승만은 회심한다. 조선의 양반가운데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 팔도에 예수 믿는 사람은 40명, 남자 가운데는 백정, 여자 가운데는 기생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대접을 받는 양반 가운데 단 한명 이승만은 회심하고 가슴에 민족복음화의 꿈을 가진다. 예수 믿은 그날부터 이승만은 조선에 1백만 명이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1) 1899년 1월 당시 조선 팔도에 개신교 신자가 40명?

(2) 그것도 백정과 기생만 믿었다?

(3) 이승만이 최초의 양반 신자?

(4) 이승만이 개종 직후부터 100만 명 구령 기도?

정말 이 연설자에게는 “이승만을 위한 이승만에 의한 이승만의” 한국 개신교이다. 

종각 옆 전옥을 헐고 1901년 신축한 벽돌 건물 한성감옥 시절의 이승만, 중앙에 키 큰 청년, 1904년 

여러 전직 고위 관리들을 개종시켰다. 성경과 소책자 혹은 복음서를 들고 있는 전직 관리들.

1904년 전후 이승만은 평복 차림에 망건도 쓰고 자유로이 외국 선교사를 만나며 공부하고 저술할 수 있었다. 

 

 

그러면 위의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해 보자.

 

(1) 1898년 9월 현재 한국 개신교까지 갈 것 없고 북장로회 통계만 해도 당시 예배처소 205개, 조직교회 24개, 세례교인 2,079명, 전교인 7,500명 등이었다. 이 강사가 본 40명 숫자는 어디서 왔을까?

 

(2) 백정 선교는 1894년에 본격화 되었다. 1893년까지 북장로회에만 세례교인 236명이 있었다. 1899년까지 기생이 회심하고 교인이 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3) 최초의 양반 신자 두 명은 1893년 서울에서 나왔다. 감리회의 경우는 최병헌(목사)으로 1888년부터 존스의 어학교사로 활동하다가 1893년 2월 8일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장로회의 경우는 무어의 전도인으로 활동한 한 씨로 1893년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한문 신약전서와 한문 소책자를 읽고 개종했다.

 

(4) 백만명구령운동은 1909년 개성의 남감리회 선교사들의 “20만 명 전도운동”이 선교회 전체 연합운동으로 확산되면서 1910년에 전개되었다. 

 

지나친 미화는 득보다 독이 된다. 한국교회 역사 왜곡은 이미 도를 넘었다. 어디서 고치기를 시작해야 할까 막막하다.

(2015년 6월 27일, 옥성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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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1875.3.26.~1965.7.19)은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 1861~1939)와 관련된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4~1907)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된 후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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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이 분 강의가 있어서 이승만 감옥 생활 첫 부분을 보니, 

1) 탈옥 사건 때 육혈포 권총을 몰래 준 사람을 배재학당 학우였던 주시경으로 설명한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나, 사실은 "12月 19日에 徐相大가 崔廷植의 家에 寄留하는 崔鶴周가 가져온 六宂砲 2柄을 受入하여 李承晩과 崔廷植에게 傳給"한 것이다. (고종시대사 4집   >   光武 3年 7月 27日   >   法部에서 平理院裁判長 洪鍾宇의 質稟書에 따라). 그래서 최정식은 탈옥 도주 후 체포되었을 때 교수형에 처해 진다. 만일 이승만이 주도하여 권총을 밀반입해서 탈옥을 시도했더라면 교수형에 처해 졌을 것이다. 


2) 탈옥 실패 후 1899년 이승만이 얼마나 감옥에서 고생하고 고문을 당했는지 설명하면서, 당시 사형 언도를 받은 자들은 얼마 후 끌려나가서 목을 자르는 단두형에 처해 졌다고 실감나게 설명한다. 망나니도 등장하고, 그 목이 날라가는 죄수의 비명소리를 감옥 안에 있는 이승만이 들었다고 소설을 쓴다.

첫째, 심한 고문은 없었다. 189711감옥서 규칙을 마련하고, 수감자의 인권을 강화했는데, 3조에서 감옥서장은 평상시 요원을 계칙하여 죄수에게 학대하지 못하게 하고라고 하여 고문이나 학대를 금지했다.

둘째, 강사는 갑오개혁으로 참수형(단두형)이 폐지되고 교수형으로 대체된 사실을 모른다. 1899년 대한제국 형법제도와 감옥제도를 공부한 후에 이런 강의를 해야 할 것이다. 남대문안 선혜신창 임시 감옥서에 있는 이승만이, 칼날에 목이 날라가는 죄수가 외치는 "대한제국 만세"를 어떻게 듣나?  ( https://www.youtube.com/watch?v=L0K6mjvnm4U  29분 부근)

1894727일부터 1년간 진행된 갑오개혁을 통해 단두형은 철폐되고 교수형으로 대체되었다. 그 직전 전봉준은 1894424일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 졌다. 1898년 최시형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따라서 1899년 참수형은 없었다. 다만  19009월에 국사범에 대한 참수형이 부활되었다. 1901년 김영준은 참형 선고에도 불구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참형에 처해진 죄수들이 제법 있었다. 참수형은 19052월에 폐지되었다. (皇城新聞, 光武 91905.2.27.)

이승만의 전도사가 되려면 제대로 공부를 해서 강의를 하기 바란다. 목사의 이름으로 하려면 더 열심히 바로 공부해서 오도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루에 이승만 관련 책 500쪽 씩 여러 달 공부한 사람치고 너무 허술하다. 하루 5쪽을 읽어도 제대로 읽고 확인하는 작업이 더 중요할 것이다. 더 듣고 싶어도 듣기 어려운 강의이다.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가 반복되는 강의라면 다른 좋은 내용도 함께 신용을 잃게 된다. 청년 이승만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라.  (2019년 1월 31일, 옥성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