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교회는 언제 설립되었나?
1884, 1885, 1886, 1887년 중 언제?
1925년 12월호 Korea Mission Field에 실린 번하이젤 목사가 쓴 소래교회 40주년 기념식 글이다. 발표된 시점과 행사를 보면 1885년에 소래교회가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첫 페이지 세 번째 문단을 보면 한국에서는 나이를 셀 때 아이가 태어나면 한 살이듯이, 교회도 설립될 때 한 살로 치기 때문에 실제로는 1886년에 소래교회가 설립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886년이라면 로스 목사가 지푸에서 보낸 한문 신약전서와 전도문서, 한글 복음서들을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묄렌도르프 부부의 도움을 통해 받아서 공부하며 예배를 드리던 때였다. 곧 1886년 서경조가 로마서를 읽고 '심중전'을 하며 바울을 따라 죽음을 각오하고 믿기로 작정하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세 사람은 1887년 1월 27일 서울에 올라와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번하이젤이 정리한 글을 보면 1886년 가을에 이들의 요청으로 언더우드가 소래에 와서 여러 명의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첫 성찬식을 거행했다고 쓰고 있다. 즉 언더우드의 첫 소래 방문과 예배와 세례와 성찬을 교회 설립의 시작으로 보았다. 토박이론(전택부), 민족교회론(민경배), 수용론(이만열)과 반대되는 선교사관이었다. 흔히 선교사관으로 썼다는 백낙준의 책 The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929)보다 4년 전 사건이요 해석이다. 백낙준 이전에 선교사들이 그런 선교사 중심의 사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인(소래교인)들도 그렇게 보았는가이다.
번하이젤의 해석에서 심각한 문제는 언더우드가 소래를 처음 방문한 때가 1886년이 아니라 1887년이라는 점이다. 1885-87년 언더우드와 관련된 간단한 연표를 보자. 언더우드는 1887년 봄 처음으로 북부 지방 여행을 계획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일본으로 갔다. 1886년에는 지방으로 여행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885. 4. 5. 제물포와 서울 도착
1886. 5. 11. 정동 고아원 개원
1886. 7. 16. 첫 개종자 노춘경 세례
1887. 1. 23. 소래에서 올라온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에게 세례 줌
1887. 봄. 요코하마에 가서 마가복음 출판
1887. 9. 27. 로스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정동장로교회 조직 (14명 입교인)
1887. 10. 28일 서울 출발. 소래,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첫 북부지방 여행.
10월 30일 주일 소래에서 4명에게 세례식
1887. 12. 15 정동장로교회에서 첫 성찬식.
즉 1887년 1월 소래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서울에 와서 세례를 받자, 가을에 언더우드가 소래에 가서 세례, 성찬을 베풀었다. 한국인들이 먼저 치고 나오자 선교사들이 움직였다.
사실 윗 글은 다음 행사 후에 쓴 글이다.
소래교회는 스스로 1885년 8월 첫 주일에 창립된 것으로 기념했다. 1925년 9월 16일자 <기독신보>를 보자. "송천교회 창립 40주년 기념식"--1925년 8월 6일 오후 3시에 예배당 후원에서 400명이 모인 가운데, 서경조 목사의 인도로 이승철 목사의 역사담과 레널즈(이눌서) 선교사, 이승길, 두 목사의 축사로 기념식은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기념식 후에는 다과식이 있었다.
따라서 다음 두 가지 설립일이 나온다.
(1) 1885년 8월 2일 (8월 첫째 주일)
이는 소래교회가 공식적으로 처음 설립일을 기념한 날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설립일로 보인다. 1925년 8월 첫째 주일에 40주년을 기념했는데, 1885년 달력에서는 8월 2일이 첫째 주일이다. 따라서 8월 2일을 설립일로 하고, 그 연도는 위에서 논한 대로 1925 - 40 = 1885년이 된다. 다만 위 기사에서는 그 설립 기준을 밝히지 않아, 이 8월 첫째 주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현재 이용 가능한 자료로는 알 수 없다. 아래 소결에 더 쓴다.
(2) 1887년 10월 30일 설
번하이젤의 말대로 언더우드의 첫 소래 방문과 소래에서의 첫 세례식과 성찬식을 40주년 기점으로 했다면, [1929년 백낙준은 서상륜의 세례가 1879년이라고 잘못 알았고, 서경조 세례는 1887년으로 바로 알았다. (앞의 책, p. 52)] 1887년 10월 30일을 교회 설립일로 보았다고 하겠다. [Underwood to Ellinwood, 1887. 11. 27: 다만 이 날 성찬식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1887년 10월 말 현재 소래에서는 9명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는 서상륜 (1882년 4월 심양에서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외에 10월 30일 세례를 받은 4명과 다른 한 사람이었다.
1887년 7월 16일 서울 정동에서 새문안교회 당회가 조직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참석했던 소래 교인들(서상륜,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4명)이 교회 설립을 의논했을 수 있다. 당회장인 언더우드가 내려와서 세례를 주고 말씀을 전했으므로, 장로교회 법적으로 타당한 설립년월이 된다. 소속 당회(새문안교회)가 정해진 이후, 미조직 지교회 형식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평가) 현재 이 설을 받아 들이는 사학자는 없다. 그러나 비록 번하이젤이 연도를 착각했지만, 선교사 언더우드가 소래를 방문하고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준 사건을 중시하는 선교사관적 입장에서 보면, 1887년 10월 30일을 소래교회의 설립일로 볼 수 있다.
소결론
40주년을 1925년에 기념하였으므로, 번하이젤의 해석과 달리, 나는 잠정적으로 1885년 8월 2일에 소래 교인들이 정기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를 설립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교회 설립을 1) 한두 명의 세례교인이 있을 때, 2) 그들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되었을 때, 3) 별도로 보이는 예배 공간을 마련했을 때라는 기준으로 본 것이다. 1885년 8월 이 모든 조건이 만족되었고, 이런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공부한 후,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세 사람은 1887년 1월 서울에 가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즉 1885년 여름 유일한 세례교인이었던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몇 명의 교인(최명오, 정공빈 포함)과 함께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고 성경과 교리서들을 공부했다. 이들은 서울에 미국 장로회 선교사들이 도착해 있다는 말을 듣고, 로스와 연락하면서 서울 선교사들을 만날 준비를 했다.
** 백낙준은 1884-85년 소래에 소수의 교인이 있었으며, 한국의 첫 교회인 소래교회가 [예배당이] 1898년에 세워졌다고 썼다. (앞의 책, p. 54) 그러나 위의 자료에 보면 1895년 첫 예배당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1895년 7월 7일 언더우드가 소래교회 예배당을 헌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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