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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890s

1896년 독립신문 영문판의 기독교 기사

1896년 독립신문 영문판의 교회 기사

독립신문 영문판과 한글판은 내용이 많이 다르다. 1896년 영문판은 헐버트가 편집했다. 따라서 헐버트의 신학이나 그의 선교관 등을 엿볼 수 있다. 

4월 14일 여주 천주교도 신목 절단 시도

여주에서 천주교 신부가 교인들에게 마을에 있는 오래 된 신목(sacred tree)을 베어 버리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이 고목은 정부 소유의 땅에 있어 정부의 소유였으나, 천주교인들은 막무가내였다. 주민들은 신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해 서울에 와서 <독립신문>에 호소했다. 헐버트나 서재필의 입장은 신목 신앙과 같은 미신이나 우상숭배를 없애는 것이었으므로 종교적으로는 신목을 베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법적으로는 타인의 재산을 불법으로 침해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곧 종교적 신념보다 국법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4월 28일 한국인 신부 3명 서품

그렇다고 천주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만 보도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 기사는 약현성당에서 세 명의 한국인 신부에 대한 서품식을 보도하고 있다.  


5월 16일 유니언교회 아펜젤러 목사 사임하고 밀러 목사 선임

The Union Church 임원 개선 보도. 독립신문은 유니언교회 소식을 이후 자주 싣는다. 이 해에 10년 간 목회가 아펜젤러가 사임하고, 밀러(F. S. Miller)가 담임목사에, 벙커(D. A. Bunker)가 회계에 선출되었다. 아펜젤러는 대신 기독교문학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John Malhelm Berry Sill, American Minister to Korea from 1894 to 1897, and his wife Sally Sill.

8월 25일 중국 북감리회 조이스 감독 방한

배재학당 채플에서 주일에 모인 외국인 개신교회 유니언교회는 외국인 사교 장소였다. 1896년 8월 한국 담당 조이스 중국 감독이 방문하자 미국 실 공사, 서기관 알렌 부부, 웨버 러시아 공사 부부, 재정고문 브라운 등이 참석했다. 사실 실 공사는 한 해에 몇 차례 설교도 했다.  

10월 22일 미북장로회 연례회의 사설

가장 노골적인 선교사 지지 태도는 10월의 북장 한국선교회 연례회의 보도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친구이다. 그들은 정교 분리 원칙에서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으며 권세(영향력)를 행사하지 않는다고 변호했다. 그러나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사설만으로도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권세를 가진 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선교사들의 기본 원칙은 정교분리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학생들이 협성회를 조직하고 이승만 등이 시위에 참여하고, 언더우드, 헐버트 등이 개혁 운동을 지지하자, 미국 공사 실은 정교 분리, 곧 권세 행사 중지를 주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