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빵의 겉 조각은 왜 존재하나?
ⓒ옥성득
미리 잘라서 파는 식빵을 먹을 때 맨 위에 있는 첫 조각(껍질이라 딱딱하거나 탄 부분)은 뚜껑처럼 거의 먹지 않고 안쪽 부분들의 수분 방지 등의 용도로 끝까지 이용하다가 마지막에 먹거나 버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에서 이것을 먹는 것은 내 몫이다.
아마도 대학 시절 배고팠던 기억과 군대에서 읽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때문일 것이다. 수용소 안의 유대인들은 아침에 빵을 배급 받을 때 그 딱딱한 부분을 가장 받고 싶어 했다. 부드러운 안쪽 조각들은 부피에 비해 금방 없어지는데 반해 딱딱한 껍질 부분은 오래 음미하며 먹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
내가 공부하는 1세대 개신교 역사는 어쩌면 그 딱딱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나는 또한 내 공부가 후배들의 멋진 빵 슬라이스를 위한 뚜껑 역할로 남기를 바란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이 딱딱한 부분을 먹으며 자료집을 만든다.
엉성하고 딱딱해서 먹기 어려워도 좋다. 어차피 첫 피스이니까 이해할 것이다.
나는 일차자료를 자료집으로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일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고,
지난 10년 넘게 매일 최소한 책 3페이지 정도를 영문으로 한글로 만들어 왔다.
자료집이 일종의 겉 껍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껍질 조각을 50개 정도 만드는 것이 내 꿈이다. 그러면 그 안에 후배들이 만들 고소하고 맛있는 빵 조각 500개는 족히 넣고 함께 먹힐 수 있을 것이다. 올해까지 권 당 평균 650페이지로 15권 정도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그 딱딱한 조각이 다른 부드러운 부분에 비해 오래 가고,
오래 씹으면 새 맛이 우러나온다는 것을 내심 알기 때문이다.
사료를 꼭꼭 천천히 씹으면서(學) 음미하고
그것이 무슨 맛인지 질문(問)하며 먹어야 항문(學問)으로 잘 내려간다.
2012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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