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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일반 단상, 광고

나는 차라리 숙명론이 좋다

목사가 되어 팔자를 고친 자가 많다.

“팔자 운명이다”라고 할 때의 팔자와 “팔자를 고친다”고 할 때의 팔자는 원래 같지만, 후자에는 적극적인 인간의 노력이 들어간다.

따라서 한국인의 운명관은 사주팔자 숙명론인 동시에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변천론이 공존한다. 명당이 아닌 땅도 비보를 통해 명당으로 고쳐진다. 관상도 심상이 으뜸이라 세월에 따라 고칠 수 있다. 같은 논리로 사주팔자도 진인사대천명으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다음과 같은 해석이다. 과거 벼슬을 하지 않은 일반 상놈이 죽으면 묘비에 “학생 해주 오공지묘”처럼 직위명(學生, 孺人) + 본관(해주) + 성(오공) + 지묘라고 썼는데 대부분의 묘비는 이 8자였다. 그런데 과거에 붙어 벼슬을 하면 “한성판윤 해주오공지묘”처럼 글자가 늘어나 10자나 12자 등이 되어 8자가 고쳐졌다. 그래서 돈을 주고서라도 양반 관직을 샀고, 돈이면 “팔자를 고친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 때가 18-19세기였고, 박지원의 <허생전>이나 <양반전>이 나와서 이를 풍자했다.

80년대 이후 대도시에 대형교회가 등장하면서 이 팔자를 고친 목사들이 많다. 교회 크기가 벼슬이 되어 족보에도 올리고 묘비에도 올릴 수 있는 “OXOXO교회 목사 명당 ZZZ 박사의 묘”와 같이 8자를 18자로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그냥 “목사 홍길동의 묘”처럼 7자로 살자. 5자도 족하다. 아니 묘비 없이 흠 없이 사라져도 좋을 것이다. 그게 팔자요 소명이요 부르심이다. 18자 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다.
ⓒ옥성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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