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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승만

이기붕의 몰락

1960년 3월 정·부 대통령 선거

이승만은 81세, 감리교회엔 장로가 없고 장로 임기는 70세가 은퇴인데도, 장로교회 표를 얻기 위해 정동제일교회가 1월에 명예 장로직을 주었다. 그러나 선거 한 달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조병옥(趙炳玉, 1894~1960년 2월 15일)이 사망하자 대통령 선거는 하나마나가 되었고, 문제는 노령의 이승만 대통령이 사망할 수도 있었으므로 부대통령을 기독교인으로 뽑기 위해 부정 선거를 적극 지지했다. 상대는 천주교인 장면, 개신교 대 천주교가 대결했다. 개신교가 부정으로 이기자 환호했으나, 4.19로 천주교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

기독교도중앙위원회는 이승만 이기붕 당선을 위해 이런 포스터를 붙이고 적극 지원했다.
이기붕 집무실, 뒤에 아내의 초상화가 크게 걸려 있다.

1957년 3월 이기붕의 아들 강석이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가 되다 

이기붕은 선교사 서기 노릇을 하다가 미국에 유학을 가서 1923년 아이오와 주 데이버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에 갔다. 뉴욕 교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났다. 1934년 이화여전 강사를 하던 박마리아와 결혼했다. 장남 이강석(李康石), 장녀 이강희, 차남 이강욱(李康旭) 자녀가 태어났으나 장녀는 이화여중 재학 중 병으로 사망하고 두아들만 남았다. 해방 후 이기붕은 아내와 프란체스카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하여 대통령 비서로 승승장구한다. 그의 성공 뒤에서 작용한 부인 박마리아의 절묘한 권모술수는 한국 사회에서 화제거리가 되었다.박마리아는. YWCA 회장으로 선교사들과 가까웠고 여성 지도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양자 입적 기념 사진, 1957년

박마리아의 최대 프로젝트는 큰 아들 이강석을 아들이 없는 이승만의 양자로 만들고, 남편을 부대통령으로 만들어 이승만의 후계 구도를 가계 족보로는 아들로, 정치적 후계자는 남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야망은 1960년 3월 선거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는 4.19 학생의거를 불러 왔다. 사람들은 부정의 책임을 이기붕에게 물었다. 

1960년 4월 26일 아침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 사퇴 담화
아침 일찍 비서에게 하야 성명서를 타이핑하게 했다. 마음을 정리했다. 이어 10시 경 간단한 감사의 편지 두 장을 비서에게 담담히 불러주면서 타이핑하게 한 후, 사퇴 담화 발표장에 나갔다. 

4월 22일까지 그는 4.19 이후 시위의 발전에 대해 잘 보고받지 못하고 있었다. 23일부터 사태를 파악하고 24일에는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했으며, 26일 아침 탱크가 경무대를 지키고 대형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 미국 대사 등이 이승만을 만나 유혈사태가 임박한 것을 알리고 이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다. 

그는 사태를 파악하고 준비한 사퇴 성명서를 읽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들고 일어선 청년들을 보며 대한민국의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사실 그가 20대였던 1898년 종로에서 했던 일이었다.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측근들에게 그는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인민이 내가 그만둘 것을 원하면 물러나면 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최소한 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에 따르는 정치임을 알고 있었다.이승만 입장에서 사퇴는 담담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자리에 연연해 하거나 울먹이지 않았다.

참고 1 https://adst.org/2013/04/the-fall-of-south-korean-strongman-syngman-rhee-april-26-1960/

자료 2 이승만 하야 담화문 (라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U9JHHgNQJOY

 

4월 28일 새벽의 총성

4월 28일 새벽,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진 이기붕은 미국으로 도주하려고 했었으나,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이 권총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李康旭)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일가족은 몰살했다. 아들까지 바치면서 이승만의 차기를 노리던 욕망의 덩어리 이기붕 일가는 순간에 무너졌다. 승만 정권을 찬성했던 자나 반대했던 자나 모두 충격을 받았다. 네 사람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Yi Kangsok, then an army lieutenant, took his pistol and killed his natural parents and younger brother and then himself, in an act of family atonement.)The whole nation, whether they were for or against the Rhee regime, was shocked. All of them were Christians. That was a disgrace to many Christi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