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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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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 제일교회, 제2교회
1910 전주 레이놀즈 선교사 가족과 사택 William D. Reynolds Family, with two Korean nurse mothers, Chunju, Korea, 1910 벽돌 건물에 기와 지붕, 벽난로를 두 개나 넣고, 이층 다락방에 예쁜 창문을 내어 햇빛이 들어오게 했다. 현관문 옆에 서양식 기둥을 세워서 다른 집과 차별화. 레널즈는 이 때 구약전서 번역을 마무리했다. 즉 1910년 4월 2일 레이놀즈는 서울에 있는 영국성서공회 한국 지부 밀러(Hugh Miller) 총무 앞으로 "번역 다 되엿소”라는 전보를 보냈다. 1911년 최초의 한글 성경전서가 출판되었다. 위 사택은 세 번째 주택이다. 아래는 1898년에 다가산 언덕에 신축한 레이놀즈의 두 번째 사택이다. 이 사택은 다음 다가산 언덕 위에 있었다. 침고로 1900년에 세워..
1932 진주교회 새 예배당 완공 윤인구 목사가 그린 진주교회 St. Paul's Church, 1932년 10월 완공 한국교회에 유행하게 되는 전형적인 고딕 양식으로, 이때부터 교회당 앞에 높은 십자가 탑을 세우고 큰 문으로 들어와 남녀석 두 개 출입구로 갈라져 장방형 예배실로 들어가는 양식이 유행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일제 말기로 가면서 한국교회는 열악한 상황에서 좀 더 수직성을 강조하고 종말론을 강조하게 되었다.
1929 삼천포장로교회 신축 1929년 3월 28일 삼천포장로교회 신축 예배당 함석 지붕, 난로를 설치했다. 종탑이 높다. 넓은 입구를 두개 만들어 남녀 출입을 쉽게 했다. 초가집 시절은 대개 박해와 핍박의 시대였다. 그 어려운 시절을 견디며 삶으로 모범을 보인 교회가 드디어 함석지붕 예배당을 짓고 목사들을 초청하고 교회 헌당 예배를 드리는 감격을 맛볼 때 찍은 사진이다.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인정을 받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90년 후 지금 예배당과 교회의 모습은 또 얼마나 낯선가?
1935 포항교회 30주년 [그리운옛날] 포항교회 30주년, 1935 1905년 아담스(James Edward Adams 안의와, 1867-1929) 목사가 설립 1934년 새 교회당(기외지붕)을 마련하고 정인과 목사 초청, 기념식을 가졌다. 교회 설교단 좌우에 성경구절을 달았다. 오른쪽에는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한 4:24) 왼쪽에는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온 땅은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박국 2:20)이다. 회중은 마루에 의자 없이 그대로 앉았다. 남녀석 구분은 있으나(왼쪽이 여자석) 중간에 막지 않고 함께 앉았다. 현재 포항제일교회(박영호 목사 시무)이다.
1905 경북 칠곡교회 1905년 경 대구 지부에서 시골로 나가면 다음과 같은 교회가 있었다. 칠곡교회와 또 다른 초가 예배당, 그 안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모습이다. 대구 칠곡교회는 1904년 브루엔(Henry M. Bruen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로, 1904년 3월 17일 퇴천면 운암동 조분이댁에서 교회창립의 뜻을 모으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904년 5월 서자명 조사가 부임했으며(1905. 사임), 1905년 3월 퇴천면 구명동 김태하 댁 초가 3간을 예배당으로 기증받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래 사진이다.) 1905년 5월부터 김태하가 영수로 교회를 인도했다. 1905년 5월에 김성삼 조사가 부임하여 1909년 사임할 때까지 시찰을 지도했다.
경북 영천읍교회, 초가 삼간(1905)에서 기와 신식 건물(1921)로 경북 영천제일교회, 초가삼간(1905, $6)에서 기와 목조/벽돌 건물(1921, $3,750)로: 한국 초기 교회의 발전을 잘 보여주는 두 사진 1900년 초에 세워진 시골 교회는 초가 삼간에서 출발했다. 20년이 지나면 4000달러 상당의 연보를 모아 번듯한 신식 예배당을 지었다. 다음 사례는 경북 영천읍교회이다. 영천읍교회는 1904년 4월 10일 아담스(James Edward Adams 안의와, 1894년에 내한, 1897년 5월에 부산에서 대구로 전임) 선교사의 인도로 화룡동 배선달의 사랑방에서 박수근을 위시한 20여 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905년부터 청통면 우천동에 초가삼간을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고, 1906년에는 교인이 40여 명으로 늘어나 예배 처소가 협..
100년 전 한국교회 예배당 모습 1920년 송도 지역 남감리교회 예배당들의 모습이다. 한식, 양식을 적절히 조합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할 때도 절제했다. 수평성과 수직성이 조화를 이루었다. 예배당의 크기와 양식, 건축미를 다시 돌아볼 때이다. 교인 70-80명만 잘 키워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공간의 재구성, 구조 조정을 할 때이다. 개성아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