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옥 교수의 글 /교회, 선교, 신학에 대한 단상

1932 니이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내가 대학 다닐 때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영향을 받은 책의 하나가 바로 1932년에 나온 이 책이다. 한국에서는 라인홀드 니이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이병섭 역, 현대사상사, 1972, 1986년(14판).

학부 시절 SFC 지도교수로 강의해 주신 손봉호 교수님 소개로 3,300원이나 주고 사서 읽었다. 점심 다섯 끼 값이었다. 당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비도덕적 인간과 더 비도덕적 사회"를 배웠고, "별 수 없는 인간"을 배웠다.

니이버는 1932년 초판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든 모든 낭만주의와 정치적 낙관주의는 죄악된 인간과 집단 이기주의 때문에 실패한다고 예언했다. 그의 정치적 리얼리즘은 냉전 구도를 만들었으나 실용주의적 접근은 지금도 유용한 면이 많다.

이후 60년 동안 사라진 이념과 주의는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을 읽을 때는 주사파가 캠퍼스 운동을 지배할 때이다. 그 286들이 자라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 정치를 환상, 낭만, 낙관, 불의, 불안으로 점철된 잠정적 평화만 이루고 돌고 도는 순환적 구조를 만들었다. 한국교회는 그냥 그 안에서 함께 돌아갔다.

"평화는 폭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기에 늘 불안하고 불의하다. 불의하므로 잠정적이다. 그래서 사회는 끊임없는 전쟁 상태 속에 있다. ... 톨스토이식 평화주의는 환상이다.."

 

정치는 이상주의보다 현실주의로 접근해야 한다. 개인이 아무리 선해도 구조적 악 앞에서는 무력하다. 따라서 국제 정치에서는 힘으로 악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니이버는 주장했다. 그 결과물은 냉전체제였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나 국가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는 명제는 유효하다. 교회도 하나의 기구이고, 국가는 더 강력한 기구이다. 기구주의는 기독교 영성을 죽인다.

교회 세습을 보면서 책을 넘긴다. 집단은 더 부도덕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욕에 사로잡혀 있다. 도덕적 권위를 가져야 할 종교 집단이 그럴 때에는 해결책이 없다. 조계종도 장로교회도 더 이상 타락할 수 없을 정도로 비도덕적인 집단이 되었다. (1) 좀 더 양심적인 이들을 훈련해야 하고, (2) 그들이 연대하여 좀 더 도덕적이고 법적인 방법으로 (도덕적 법적 힘과 권위를 가지고) 덜 도덕적인 집단을 몰아내야 하고, (3) 덜 위선적인 집단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이 땅에 완전한 정의도 없고, 완벽한 평화도 없지만.

마틴 루터 킹을 사찰했던 FBI 국장이 가장 좋아한 신학자는 니이버였고, 오바마가 노벨상을 받을 때 언급한 가장 존경하는 미국인 지성인도 니이버였다. 인간 사회의 비도덕성을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정치적 현실주의 입장에서 구조악과 싸울 수 있다.  

다음은 신동수 Don Shin 목사가 2016년에 쓴 글이다. 

도덕적인 인간들이 모여서 비도덕적인 사회를 만들 때...
 
1. 사람들은 이 세상에 도덕적인 사람들 (종교적인 사람들) 이 넘쳐나면 도덕적인 사회 혹은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낭만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 인간과 사회이해에 뼛속까지 서늘해지도록 찬물을 끼얹은 분이 계시니 바로 라인홀드 니이버 (Reinhold Niebuhr) 목사이다.
 
2. 1932년 판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에서 그는 종교학과 윤리학의 놀이터에 원자폭탄을 던졌다. 이것은 그가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던 신학적 스승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1920년 대 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원자폭탄이라던 비유를 빌려 본 것이다. 니이버의 사회 윤리는 그 치열한 현실주의와 변증법적 논리로 1930년 이후 미국의 종교, 윤리학계를 휘몰아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니이버 목사는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이며, 실천신학자이다. 1971년 서거하기까지 "기독교와 위기" 의 주필로서 1920년대 이후 미국의 자기만족적 낙관주의에 철퇴를 가하며, 인간의 죄성의 심각성과 그 심각성이 끼치는 사회적, 국제적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 을 현실적으로 제시하고자 애썼던 인물이다.
 
4. 니이버의 테제는 간명하다: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나 일단 집단과 사회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사회의 비도덕성을 묵인하고 강화하게 된다" 는 것이다.
 
5. 니이버에 의하면 한 사회 집단의 윤리성은 그 구성원 각자의 도덕성에 의해 유지되지 않고 유지될 수도 없다. 오히려 개인적 도덕성은 한 사회 집단이 추구하는 집단 정의의 논리 (권력 및 강제의 필요) 에 의해 너무도 쉽게 매몰되고, 결국, 도덕적 개인의 존재가 비도덕적 사회를 만드는 요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6. 특별히 종교 (신앙) 적 신념으로 도덕적 삶을 영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니이버의 분석을 살펴보라.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에 기반한 도덕적 삶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 신앙은 도덕적 삶을 가능케 하고 많은 갈등과 분쟁을 사라지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결국 '화평케 하는 자' (peace-maker) 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러나, 과연 신앙을 가진 개인이 어느 사회집단에 소속이 되어있을 때에도 동일하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는가?
 
7. 니이버는 종교인이 가지는 네 가지 도덕적 인자를 언급한다: "금욕주의," "사랑," "자기성찰," "소망" 이 그것이다. 금욕주의는 개인적 자아와 자기유익을 부인함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평화를 도모케 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필요와 유익에 집중하게 하고, 자기성찰은 자신 안에 있는 이기적 욕구를 발견하고 억제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대한 소망은 현실적 고통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대안으로서 인내와 변혁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에 기반한 도덕성은 그 대상이 개인의 영역에 머무를 때에 큰 효과가 있지만, 사회적 정치적 영역으로 발전하면 도리어 강한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신앙의 핵심은 절대자 앞에 선 개인인데, 개인이 사회집단 안에 소속될 때 개인의 신앙은 오히려 "절대화" (absolutizing) 의 과정을 밟게되어 갈등과 반목의 요소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제, 집단 (사회) 안에 있는 개인 (혹은 그룹) 의 관심과 이익을 대변하고 강화하고 투쟁케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이다.
 
8.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착하고 도덕적인 신앙인 일 수 있지만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서로 악수를 할 수 있지만), 그들이 다른 가치와 신념과 행동양식을 가진 그룹에 속해있을 때 (무슬림과 카톨릭, 카톨릭과 개신교, 개혁파와 루터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 한국인과 일본인, 민주당과 한나라당), 그들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게 된다.
 
9. 그의 '비판적 기독교 사회윤리' 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내가 잘하면 되지' 혹은 '내가 도덕적이면 사회도 도덕적이 되겠지' 하는 낙관적 윤리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가? 우리는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만나면 '도덕적' 인 신자들을 수 많이 보아왔지만, 그들이 어느 교회나, 단체나, 정당이나, 심지어 어느 지역에 속한 후에는 그들 또한 너무도 쉽게 비윤리적 행태 (내 편 봐주기, 상대편 무조건 비난하기)에 빠져 버리는 것을 더 많이 목격하게 되지 않는가?
 
10. 사실, 니이버는 이 책에서 완전히 도덕적인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다만, 현실적 기독교 윤리의 최선은 그 개인적 도덕성과 사회집단의 비도덕성의 간격을 최소화 하기 위한 노력과 투쟁, 그리고 강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개인의 신앙과 도덕성은 그 한계가 있음을 니이버의 고언을 통해 새겨 들어야 하겠다. 혹, 내가 속한 그룹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비도덕성에 어느새 눈감아주고 동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개인적으로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다고 보면서도, 그 교회의 일원으로서는 오히려 교회의 비리와 탈선을 방조한다던지.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교회가 세워주었으니 하나님의 뜻으로 받고 최선을 다하겠다든지. 개인적으로는 다른 인간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서슬퍼런 비방을 꺼리낌 없이 한다던지.
 
11. 이제는 집단적 자기성찰 (introspection)과 집단적 정의를 세우기 위한 체계와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성경의 하나님은 개인에게 뿐 아니라 민족 (혹은 공동체) 와 교회 전체를 향해 회개의 메시지를 주고 계심을 기억하라. 우리는 결코 내가 속한 모임과 사회와 국가에 존재하는 비도덕성을 안이한 자세로 바라보면 안되겠다. 도덕성을 갖춘 집단의 힘을 동원해서라도 비도덕적인 집단을 제어하고 심지어 퇴출시키는 체제. 이것이 도덕적인 개인들이 집단적으로 행할 수 있는 기독교 사회 윤리의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옥 교수의 글 > 교회, 선교, 신학에 대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은 선교사  (0) 2020.04.20
로마 멸망 한 원인: 종교 중독  (0) 2019.07.13
유자 탱자 망자  (0) 2019.05.16
귀추법에 빠진 한국 교회  (0) 2019.04.29
missional life  (0) 2019.04.08